선조님들의 역사자료

恭人[공인] 李氏[이씨] 行錄[행록]

돌지둥[宋錫周] 2022. 7. 10. 09:14

恭人[공인] 李氏[이씨] 行錄[행록]    宋浚吉[송준길]

안동 판관공 희건

 

공인은 국성(國姓)으로 태종대왕(太宗大王)의 아들 근녕군(謹寧君) 예(禮)의 후예이다. 부 천유(天裕)는 주부를 지냈고, 조 수(壽)는 사의를 지냈으며, 증조는 오림수(烏林守) 함(諴)이고, 고조는 검성정(劍城正) 즙(楫)이며, 외조는 최계훈(崔繼勳)으로 사예를 지냈는데, 영의정(領議政)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항(恒)의 후손이다.
공인은 융경(隆慶) 신미년(1571, 선조4) 1월 26일에 서울집에서 출생하여, 만력(萬曆) 기축년(1589)에 판관공(判官公)에게 시집왔다. 공인은 너그럽고 현철하여, 크고 작은 일 할 것 없이 모두 판관공의 뜻을 받들어 따랐다. 판관공에게는 계모(繼母) 신씨(申氏)가 계셨는데, 공인은 신씨를 섬김에 예를 어기지 않았다. 판관공이 빈객(賓客)을 좋아하였는데, 공인은 주식(酒食)을 성대히 장만해 접대하였고, 갑자기 음식을 장만해도 맛이 뛰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리고 음식 솜씨가 좋은 사람을 꼽을 적이면 반드시 공인을 으뜸으로 삼았다.
공인은 항상 여러 며느리들에게 말하기를, “부녀자의 도리는 오직 남편에게 순종하고, 제사를 공경히 모시고, 음식을 정성스럽게 장만하는 데 있을 뿐이고, 이 밖에는 할 일이 없다.” 하였다. 매양 진귀한 음식을 얻으면 그때마다 제사에 쓰기 위해 잘 갈무리하였다. 제삿날에는 반드시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고,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정시(正時)에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면 비록 제사를 지냈다 하더라도 제사 지내지 않은 것과 일반이다.” 하고서, 반드시 첫닭이 울기 전에 집안사람들에 앞서 일어났는데, 비록 70세가 된 이후에도 한결같이 하였으니, 이는 대개 그 천성이 그러해서였다.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하나도 빠뜨림없이 꼼꼼히 따져, 모든 것을 반드시 미리 준비해 간직해서 불시(不時)의 수요(需要)에 대비하였으므로 음식과 의복에서부터 술잔이나 나무그릇 등 각종 물건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부족함 없이 아름답게 갖추어졌다. 그러므로 빌려가는 사람들도 흐뭇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종당(宗黨)을 도리로 대우하여 기한(飢寒)을 구휼(救恤)하고, 노복을 은혜로 부려 고달픈 일과 수월한 일을 고르게 시켰다. 상하 내외에 모두 환심을 얻었으므로 공인이 사망하자 모두 슬픔을 다해 울었다.
판관공이 임소(任所)에서 별세하자, 공인은 매양 영결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통한으로 여겨, 과부로 지내는 17년 동안 하루도 마음에서 그 통한을 잊은 적이 없었다. 자제에게 허물이 있어도 심히 꾸짖지 않고, 좋지 않은 안색만을 약간 보여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린 뒤에 경계하는 말을 하였다. 자녀가 매우 많았으나 눈앞에서 죽은 자가 하나도 없었고, 임종할 때는 자손이 모두 모여 집안에 가득 차니, 보는 자들이 부러워하면서 모두 “세상에는 공인의 복록에 비교될 수 있는 이가 드물다.”라고 하였다.
무자년(1648, 인조26) 1월에 작은 병에 걸려 6월 17일에 끝내 일어나지 못하였으니, 향년이 78세였다. 복인(卜人)의 말에 따라 그해 8월에 판관공의 무덤 밑에 임시로 모셨다가 이듬해 4월 22일에 판관공의 무덤 왼쪽으로 옮겨 부장(祔葬)하였으니, 묘역은 같으나 봉분(封墳)은 다르다.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국시(國蓍)로 생원이고, 차남은 국보(國輔)로 생원이고, 삼남은 국귀(國龜)이고, 사남은 국신(國藎)이며, 장녀는 사인(士人) 이업(李𥣈)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정주 목사(定州牧使) 소동도(蘇東道)에게, 삼녀는 생원 김손현(金巽賢)에게, 사녀는 진사 권양(權諹)에게 시집갔다.
국시는 현감 김덕민(金德民)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규정(奎禎)은 현감 황신(黃紳)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고, 차남 규상(奎祥)은 사인 이정생(李挺生)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고, 삼남 규창(奎昌)은 아직 미혼이고, 장녀는 사인 변휘(卞撝)에게 시집갔는데 후사 없이 죽었고, 차녀는 처녀로 죽었고, 삼녀는 아직 어리다. 국보는 사인 이정기(李挺期)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어리다. 국귀는 현감 권위기(權爲己)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국신은 진사 황덕윤(黃德潤)의 딸에게 장가들어 4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이업은 3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시우(時雨)이고, 차남은 상우(商雨)이고, 삼남은 아직 어리다. 소동도는 자녀를 두지 못하였다. 김손현은 6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항(沆)이고, 차남은 준(浚)이고, 삼남은 윤(潤)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며, 딸은 사인 이정번(李廷蕃)에게 시집갔다. 권양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박(博)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내외손(內外孫)이 거의 50여 인이나 된다. - 판관은 바로 송공 희건(宋公希建)이다. -
 

同春黨集[동춘당집] 제20권 / 行狀[행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