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寶蓋山寺璧[제보개산사벽] 柳夢寅[유몽인]
보개산 절의 벽에 쓰다. 癸亥[계해 : 1623년 인조 1년]
七十老孀婦[칠십로상부] : 70세의 나이 늙은 청상 과부
單居守空壼[단거수공호] : 홀로 살며 빈 규방 지키고 있네.
慣讀女史詩[관독여사시] : 여사의 시를 익숙하게 읽어보고
頗知妊姒訓[파지임사훈] : 자못 태임과 태사의 교훈 안다네.
傍人勸之嫁[방인권지가] : 이웃 사람이 시집가라 권하는데
善男顔如槿[선남안여근] : 어진 사내의 얼굴이 무궁화 같네.
白首作春容[백수작춘용] : 흰 머리를 젊은 모습 꾸민다면
寧不愧脂粉[영불괴지분] : 어찌 연지와 분이 부끄럽지 않겠는가.
寶蓋山[보개산] : 철원군에 있는 산으로 금강산에 머물던 유몽인이
인조반정 소식을 접한 후 하산하여 집으로 가던 도중에 들렸던 절에 쓴 글임.
孀婦[상부] : 나이 젊은 과부
女史[여사] : 宮中[궁중]에서 글을 맡은 女官[여관], 또는 어진 여자의 사적을 적은 글.
姙姒[임사] : 妊[임]은 文王[문왕]의 어머니 太姙[태임], 姒[사]는 武王[무왕]의 어머니 太姒[태사].
덕이 있는 부인의 대표로 든다.
폐모론이 일어났을 때 여기에 가담하지 않고 도봉산 등에 은거하며
성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이에 따라 1623년 인조반정 때 화를 면했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 해 7월 현령 柳應泂[유응경]이
“유몽인이 광해군의 복위 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해 국문을 받았다.
마침내 逆律[역률]로 다스려져 아들 柳瀹[유약]과 함께 사형되었다.
연려실 기술 중 柳夢寅[유몽인]의 옥사 편에 계해년(1628년 7월 27일) 유몽인이
楊州[양주] 西山[서산]에서 체포되니, 국문을 맡은 정승이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역적모의를 했으며, 또 왜 망명하였느냐?” 하니
몽인이 “광해가 망하게 되리라는 것은 부인이나 어린 아이도 다 아는 일이고,
새 임금의 거룩한 덕은 천한 종들도 아는 일인데
내가 어찌 성군을 버리고 못난 임금을 복위시킬 뜻이 있겠소.
또 나는 망명한 것이 아니고, 서산에 갔던 것뿐이오.” 하였다.
정승이 말하기를, “네가 서산에 갔었다는 말은 나도 알아듣겠다.
武王[무왕]이 箕子[기자]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면
伯夷[백이] 叔齊[숙제]는 서산에 들어갔겠느냐?” 하니
몽인이 묵묵히 오래 있다가 말하기를,
“내가 전에 ‘孀婦詞[상부사 : 청상과부의 노래]’를 지어서 내 뜻을 표현하였는데,
이것이 죄가 된다면 죽어도 할 말이 없소.” 하고,
위의 ‘孀婦詞[상부사]’를 외워 고하였다.
그 뒤 정조 18년 갑인(1794) 5월 12일(무술)에
故[고] 예문관 제학 柳夢寅[유몽인]의 官爵[관작]을 회복시켰다.
대신들의 건의 내용에 : 유몽인이 옛 임금을 위해서 지조를 다 바치다가
몸은 誅戮[주륙]을 당하고 이름은 죄안에 남아 있으니,
이를 원통하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유몽인이 昏朝[혼조 : 광해군]의 초년에 한 차례 亞銓[아전]을 거쳤으나
凶徒[흉도]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한가한 관직을 전전하거나
산수를 찾아 떠돌아다닌 지가 십수 년이나 되니,
혼조에서 벼슬한 본말에 대해서도 인정할 만한 점이 있습니다. 하니
정조는 전교하기를,
“한을 품고 원통한 마음을 지닌 지가 100년이 되었는데도
누구 하나 원통한 마음을 풀어 주는 일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흠이 있는 일이며 은전이 결여된 것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대체로 유몽인의 事蹟[사적]은 천한 사람들도 외우고 부녀자와 어린애까지도 전하니,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원로의 말이 아니더라도 공론은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
신하로서 자기 몸을 내던지거나 목숨을 버리는 것은 큰 절의를 지킨다는 의미에서는 마찬가지지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난이도가 각각 다르다.
그러므로 차분히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강개한 마음에 복받쳐 목숨을 끊는 것보다 나은 듯하니,
유몽인은 어찌 어려운 길 중에서도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겠는가.
〈柏舟[백주]〉의 노래를 시골의 저속한 말이라고 말하지 말라.
南麓[남록]의 시는 참으로 보기 드문 매우 훌륭한 곡조이다.
그 소리가 원망하는 듯하고 호소하는 듯하며,
그 뜻이 興[흥]과 같고 比[비]와 같았으므로,
이를 보는 사람들이 책을 덮었고 이를 듣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또 유몽인이 살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는 단서였다.
그가 혼조 때에는 정도를 지키고 자취를 감추어 스스로 기꺼이 몰락하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때가 되어서는 해와 달 같은 빛이
하늘 한가운데에 크게 빛나는데도 맹세한 마음을 바꾸지 않았으니,
또한 일찍이 신하로서의 본분에 조금도 흠이 없었다. 중략---
於于集 卷二[어우집 2권] 詩[시] 金剛錄[금강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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