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의 世說新語[세설신어] 375
死氣滿紙[사기만지]
청나라 때 詩學[시학]은 唐代[당대] 考證學[고증학]의 영향을 받았다.
句節[구절]마다 典據[전거]가 있어 풀이를 달아야만 그 구절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시에서 정서는 사라지고 책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시 짓기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袁枚[원매,1716-1798]는 隨園詩話[수원시화]에서 이런 풍조를 혐오해 이렇게 썼다.
"근래 시 짓는 사람을 보니 온통 지게미에만 기대어 잗달고 성글기 짝이 없다.
마치 머리 깎은 승려의 돋은 터럭이나 솔기 터진 버선의 실밥처럼 구절마다 주석을 달았다."
제 말은 하나도 없고 남의 말을 이리저리 얽어,
그것도 풀이 글을 주렁주렁 달아야만 겨우 이해되는 시를 무슨 학문하듯 한다고 했다.
또 그는 '答李少鶴書[답이소학서]'에서
"近來詩敎之壞[근래시교지괴] : 근래 시학이 무너진 것은
莫甚於以注疏誇高[막심어이주소과고]以塡砌 矜博[이전체긍박] : 주석과 풀이로 고상함을 뽐내고
수사를 동원해 해박함을 자랑하는 것보다 심함이 없다.
捃摭瑣碎[군척쇄쇄], 死氣滿紙[사기만지] : 자질구레한 것을 주워 모아 죽은 기운이 종이에 가득하니,
一句七字[일구칠자] 必小注十餘行[필소주십여행] : 한 구절 일곱 글자에도
반드시 작은 주석이 10여 줄이나 된다"고 나무랐다.
또 다른 글에서는 "대개 옛사람은 전거를 사용할 때 오직 남이 알까 염려했는데,
지금 사람은 전거를 쓰면서 다만 남이 알지 못할까 봐 걱정한다"고도 썼다.
반대로 翁方綱[옹방강]은 시에서 고증의 한계를 극복해, 시인과 學人[학인]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以學爲詩[이학위시]'의 주장을 펼쳐 원매와 정면에서 대립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김정희와 신위 등의 시에는 주석이 으레 주렁주렁 달렸다.
승려 초의는 '東茶頌[동다송]' 시 한 수에 각주를 무려 31개 달았다.
다른 출처 수십 권에서 뽑은 인용문으로 식견을 뽐냈다.
막상 그의 인용은 '郡芳譜[군방보]' 중 '茶譜[다보]'에 수록된 내용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자기 말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
원매가 또 말했다.
"用典如水中著鹽[용전여수중저염] : 전거를 쓰는 것은 마치 물속에 소금이 녹은 것같이 하여
但知鹽味[단지염미], 不見鹽質[불견염질] : 다만 짠맛으로 알 뿐 소금 모양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제소리, 제 말을 하자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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