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植

在山海亭[재산해정]

돌지둥[宋錫周] 2023. 10. 9. 10:57

在山海亭[재산해정]

書大學八條歌後[서대학팔족후]

贈鄭君仁弘[증정군인홍]

南冥 曺植[남명 조식]

산해정에 있으며 대학8조가를 써준 뒤에 정인홍 군에게 주다.

 

丙寅秋[병인추]

先生在山海亭[선생재산해정]

仁弘往侍[인홍왕시]留半箇月[유반개월]

仁弘北還[인홍북환]先生手書格致誠正歌[선생수서격치성정가]

又書此一絶於其後以與之[우서차일절어기후이여지]

병인년(1566 명종21) 가을에 선생은 산해정에 있었다.

인홍이 가서 모시면서 반 개월을 머물렀다.

인홍이 북으로 돌아가자

선생은 손수 '格致誠正歌[격치성정가]'를 쓰고

또 이 한 절구를 그 뒤에 그에게 써주었다

 

一生憂樂兩煩寃[일생우락양번원] : 한 평생 근심과 즐거움에 번민과 원통함이 겸하고

賴有前賢爲竪幡[뇌유전현위수번] : 예전 현인이 깃발 세워 다스림에 넉넉하게 힘입네.

慙却著書無學術[참각저서무학술] : 책을 지음에 학문의 기술 없으니 도리어 부끄럽고

強將襟抱寓長言[강장흉포우장언] : 힘이 센 장수의 가슴으로 받들어 긴 의견을 부치네.

 

鄭仁弘[정인홍 : 1535-1623]의 나이 31세 때인 1566년에

조식이 格致誠正歌[격치성정가]와

大學八條歌[대학팔조가]를 써주고 난 뒤 지어준 것이다.

 

南冥先生集卷之一[남명선생집1권]

七言絶句[7언절구] 1604년 간행본 인용

曹植[조식 : 1501-1572]

 

鄭仁弘[정인홍]은

조식의 수제자라는

학문적 정통성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58세라는 고령에

직접 의병을 일으킬 만큼

충의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조식과 같은 합천 출신으로

어릴 때 조식에게서 글을 배웠다.

조식은 항상 방울을 차고 다니며

주의를 환기시키고

칼끝을 턱 밑에 괴고

흐릿한 정신을 일깨웠는데,

말년에 방울은

金宇顒[김우옹:1540-1603]에게,

칼은 정인홍에게 넘겨주면서

이것으로 心法[심법]을 전하였고,

이후 정인홍은 칼을 턱 밑에 괴고

반듯하게 꿇어앉은 자세로

평생을 변함없이 하였다고 한다.

광해군 즉위의 일등공신이었던 그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중앙정계에는

그의 정치적 대리인

李爾瞻[이이첨 :1560-1623]이

핵심으로 성장하였고,

정국에 주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반대파에 대해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였다.

광해군 2년(1610) 成均館[성균관]

文廟[문묘] 從祀[종사] 논란이 일자,

그는 李彦迪[이언적 :1491-1553]과

李滉[이황 :1501-1570]을 비판하고

문묘 배향에서 제외하라고

요구하면서

스승 조식의 문묘종사를

강력히 요청하였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류들이

정인홍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그의 정치적 실천은

심지어 자신을 지지하던

문인들조차 이탈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나이 88세 되던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참형되었으며

재산은 모두 몰수당했다.

이후 그는 서인과 노론 주도의

정국이 전개되면서

조선후기 내내

역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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