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善道는(1587-1671) 조선 중기 문신으로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 효종대왕[孝宗], 현종[顯宗] 시대 인물로 자[字]는 약이[約而], 호[號]는 고산[孤山] 해옹[海翁]이며 시조[詩調]작가로, 가사[歌辭]문학의 대가[大家]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함께 국문학 사상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지요.
그의 일생은 화란[禍亂]과 당쟁[黨爭]이 치열했던 시기에 불운한 생을 산 인물로, 유배생활[流配]로 일생을 보낸 분으로 문집[文集]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시조 77首와 한문시[漢文詩]외 2冊의 가첩[歌帖]이
전해지고 있고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이 있습니다.
첯번째 流配 : 광해군 때1616년(30세)에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의 권력 남용[濫用]으로 충신을 모함[謨陷]함을 보고 부친께서[당시 관찰사] 시호비재[時乎非哉 :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말렸으나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탄핵[彈劾]의 상소[上疏]를 올리어 감언(敢言)의 선비로 조야[朝野]에 알려져 2천리 원찬[遠竄 : 2千里 밖으로 귀양보냄 遠流(원류), 遠配(원배), 遠謫(원적)]되어 북방 변경[北方邊境]지
경원[慶源]에 귀양감을 시작으로 다음해에 경남 기장으로 이배[移配]되어 인조 반정후[仁祖反政] 즉위까지 8년을 유배 중, 부친상을 당하고 고초[苦楚]를 겪음.
이때 쓴 작품이 견회요, 우후요이며 뒤에 올림.
이후 과거에 합격하여 봉림[鳳林]대군(효종)의 스승이 되어 벼슬이 올라가다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左遷]되어 벼슬을 접고 고향[故鄕] 해남[海南]에서 한적[閑寂한 전원생활을 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감에 江華島로 배를 몰아 갔지만 강화도는 이미 함락[陷落]되었고 왕이 영남[嶺南]으로 避亂갔다는 말에 해남으로 돌아가지요.
그러나 인조는 이미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치욕[恥辱]을 당한 뒤였기에 배를 다시 제주도[濟州島]로 가다가 보길도[甫吉島]의 수석[水石]에 매료[魅了]되어 그곳을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짓고 정착하여 고향 금쇄동[金鎖洞]을 오가며 시가[詩歌]생활을 계속함.(歸鄕文學)
두번 째 유배 : 52세에 왕의 부름을 받아 응하지 않자, 난[亂]중에 왕을 찾지 않고 해도[海島]에서 오만[傲慢]하게 살고 있다하여 맹덕[孟德]으로 1년간 유배 됨.
맹덕 유배 후 금쇄동[金鎖]에서 산중신곡 20수와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 2수를 지음.
그 유명한 어부사시가[漁夫四時歌]는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에서 지은것임.
세번째 유배 : 그의 나이 74세 때 효종[孝宗]의 승하[昇遐]로 조대비[趙大妃](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의 상복[喪服]을 3년설을 주장하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1년 설에 밀려 삼수[三水]로 다시 유배 됨.{이 유배지에서도 예론2편[禮論二篇]을 지었으나 이것이 이유가 되어, 유형[流刑]중 가장 가혹[苛酷]한 위리안치[圍籬安置 : 지금의 가택연금軟禁]에 처함(6년)}. 다시 광양[光陽]에 이배[移配]되었다가 2년 뒤 현종[顯宗] 8년에 석방[釋放] 됨.
만년[晩年] 유배 생활 후 85세에 영면[永眠]하심.
* 견회요[遣懷謠 : 시름을 쫒는 노래]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하나 외다하나 (그르다하나)
내 몸의 할 일만 닦고 닦을 뿐이로다
그 밖의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 줄 이시랴. (다른 일이야 근심 할 필요 있겟는가)
내 일 망녕된 줄 내라 하여 모랄 손가 (내 일이 잘 못 된 줄 나라고 모르겠는가)
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한 탓이로세
아뫼 아무리 일러도 임이 헤여 보소서 (언 놈이 아무리 헐 뜯어도.....)
추성진호루[楸城鎭胡樓] 밧긔 우러 예는 뎌 시내야 (경원성 진호루 밖에 울어 흐르는 저 시냇물)
므슴호리라 주야[晝夜]이 흐르난다 (무었하러 밤 낮으로 흐르는가)
님 向한 내 뜻을 조차 그칠 뉘를 모르나다 ( 님 향한 내뜻을 조차 그칠줄 모르는구나)
뮈한 길고 믈은 멀고
어버이 그린뜯은 만코만코 하고하고
어듸셔 외기러기난 울고울고 가나니
어버이 그릴줄을 처음부터 알아마는
님군 향한 뜻도 하날이 삼겨시니
진실로 님군을 잊으면 긔 불효인가 여기노라. (긔 : 그것이)
경원 유배지에서 지은 고신연주[孤臣戀主]의 유배시조.
나의 어리석은 만용[蠻勇]과 치졸[稚拙] 함도 당신을 위한 것일 뿐
남들이 나를 뭐라해도 님께서 이 마음 알아준다면 이 고통을 참고 견디겠습니다.
님이여 살펴 보시길......
* 우후요[雨後謠 : 경원 유배지에서 權臣 이이첨무리를 향해 읊은 시
1618년(광해군 10년) 고산유고[孤山遺稿]에 실림.
구즌비 개단말가 흐리던 구름 걷단말가
압내희 기픈 沼[소]히 다 맑았다 하나신다
진실로 맑디올 맑아시면 갇긴 시사오리라
임금을 둘러 싼 궂은비, 흐린 구름의 군신[群臣 : 이이첨의 무리]들이 다 맑아 졌으니
나도 그 물에 갓끈을 씻어 매고 임금님께 가고 싶다네요.....
* 금쇄동[金鎖洞] 은거시[隱居詩]
잔들고 혼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니
그리던 님 오시네 반가움이 이러하랴
말씀도 웃음도 아녀도 못내 묘해 하노라
자연과 일치[一致]된 경지[境地]를 느끼네요.
산중신곡[山中新曲]에서.....
*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에서
버렸던 가얏고를 줄 얹어 놀아보니
청아한 옛소리 반가이 나는고야
이 곡조 알리 없으니 집겨 노하 두어라.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전원생활[田園生活]을 느낍니다.
가야금을 타보니 청아[淸雅]한 곡조는 그대로 이지만
지음[知音 : 백아절현(白牙絶絃)같은 친구]이 없으니 집[匣]에다
넣어두는 심정을 감상합니다.
며칠 전 올린 우암 송시열의 한글시조와 비교해 보시길......
젋은시절의 고산이 부친의 권유대로 조금만 참았으면 아마
늙으막에 우암과 서로 싸우지는 않았으리라.....
유배지에서 지은 시조들은 우암이나 다른 유배시인과 다름없이
자연의 관조[觀照]와 연군[戀君], 충성[忠誠]의 情으로 나타납니다.
즉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과 나라를 위한 충성심으로 일관된
정열시[情熱詩]이겠지요.
작금의 위정자들에게 드립니다.
NLL 포기냐 아니냐에 집착하지 마시고
앞으로 NLL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에,
서민 경제와, 국부를 위함이 무엇인지 머리를 맞대고 걱정해 주시길.....
빈민 돌지둥[宋錫周]의 간절한 염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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