宋希甲[송희갑]은 雙清堂[쌍청당 宋愉[송유 : 세종조]의 후예로 측실에게서 난 사람이다.
어려서 신동이라 일컬어졌는데, 仙風道骨[선풍도골]로도 일컬어졌다.
勇力[용력]도 무리에서 뛰어났다.
나이 일곱 살 때 쌍청당 주인옹인 松潭[송담] 宋柟壽[송남수 :1537-1626] 공께서
집 뒤 눈 속의 대나무를 가리키며, “네가 능히 시를 지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대답하여 말하기를
竹也今朝喪父母[죽야금조상부모] : 대나무 오늘 아침 부모 상을 당했던가
子孫千百素衣同[자손천백소의동] : 천 백의 자손들이 소복을 함께 입었네.
晩来鳥雀来相弔[만래조작래상조] : 늦게 온 참새들이 서로 조문을 하더니
清涙欄干日下風[청루난간일하풍] : 난간의 맑은 눈물 햇살 아래 떨어지네.
라 하였다.
얼마 뒤 권필이 쌍청당에 왔다가 이를 보고 크게 칭찬함을 더하고,
“나의 의발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하고는, 드디어 데리고 가서 이를 가르쳤다.
희갑이 늘 강화도에 있으면서, 물을 긷고 땔감을 나르며 마치 하인처럼 부지런히 섬겼다.
하루는 石州[석주] 權韠[권필]이 그에게 말하였다.
“사람이 천하를 널리 보지 못하면, 시가 또한 국한되는 바가 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미 능히 할 수 없지만, 너의 근골로는 능히 이 일을 감당할 만하다.
다만 압록강 북쪽은 관문의 방비가 매우 엄하니, 반드시 모름지기 어두운 길에 숨어 엎드려 있다가
물 있는 곳을 만나거든 수영을 하여 몰래 건넌 뒤라야 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너는 모름지기 중국말을 배우고 또 수영을 익히도록 해라.”
희갑이 이 말을 듣고 뛸듯이 기뻐하며, 날마다 앞 바다에 들어가 뜨락 잠기락 하니 마치 오리와 같았다.
그러나 대저 강하의 물도 또한 능히 사람을 상케 하거늘,
하물며 바다의 짠 기운이 기혈을 삭히매 그만 병이 들어 마침내는 요절하기에 이르니,
아는 이들이 아프게 애석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희갑은 산에서 노님을 즐겨, 좋은 곳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걸어서 가서는
끝까지 구석구석 다녀보곤 하였다.
일찍이 속리산에서 노니는데 작은 암자가 깎아지른 벼랑가에 있었다.
희갑이 몸을 번드쳐 용마루를 타고 올라가, 한 손으로 서까래를 잡고 한 손으로는 붓을 잡아
이름을 쓰고 내려왔는데, 그 올라가고 내려오는 것이 한결같이 나는 신선과도 같아
지금껏 늙은 중들이 능히 이 이야기를 하곤 한다.
희갑은 장가들지 않았으므로 자식이 없다.
우리 집안에서 바야흐로 그 묘에 작은 비석 새기기를 도모하고 있을 뿐이다.
春日待人[춘일대인] 宋希甲[송희갑]
岸有垂楊山有花[안유수양산유화] : 언덕 위엔 수양 버들 산에는 꽃이 피고
離懐無処不堪嗟[이회무처불감차] : 이별의 정 안타까워 홀로 한 숨 내쉬네.
強扶衰病出門望[강부쇠병출문망] : 지팡이를 굳게 짚고서 문을 나서 봐도
之子莫来春日斜[지자막래춘일사] : 그대는 오지 않고 봄 날은 저무는구려.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은징송씨 묘역에 비만 남아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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