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간통 [문인수]

돌지둥[宋錫周] 2015. 3. 15. 08:24

 

     간통/ 문인수

 

이녘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가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그 여자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또 이녁은 샐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봤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내친김에 허둥지둥 그 여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 왔다.

해묵은 싸릿대삽짝을 지긋이 밀었다. 두어 번 낮게 요령 소리가 났다.

뛰는 가슴 쓸어내리며 마당으로 들어섰다. 댓돌 위엔 반듯 누운 옥색 고무신. 고무신 속을 들여다봤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방문 벌컥 열고 년의 머리끄댕이를 잡아챘다.

동네방네 몰고 다녔다.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

한 줌 달빛이었다.

 

- 시집『홰치는 산』(천년의 시작. 2004)

 

도발적인 시 제목과는 달리 문인수의 ‘간통’은 법리적 논의를 미학적으로 해찰한 것이거나 사회 윤리적 관점에서 매몰된 사랑을 다룬 자극적인 내용이 아니다. 설화적 상상력이 동원된 얼핏 ‘처용가’나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를 연상시키는 상황진술은 어느 편을 들거나 질타하지 않고 각자의 사정을 다 이해하는 듯 초월자적 입장이다. ‘이녁’은 자기 혹은 당신을 의미하는 지방 사투리다.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는 것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성적 불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또 이녁은 샐 녘에사 들어’온 것인데, 어디 가서 기운 다 빼고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고’는 꼬락서니를 보고 열이 뻗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게다.

 

 이미 날은 샜고 남편과의 사랑은 물 건너갔다. 소리 죽일 이유도 없겠으나 아무튼 ‘소리 죽여 일어나 밖으로 나가 봤다’ 물증을 잡기 위해서다. ‘댓돌 위엔 검정 고무신이 아무렇게나 엎어졌고,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흥건히 쏟아져 있었다.’ ‘흰내’는 시인의 고향인 성주군 초전면을 질러 흐르는 하천으로 정식 명칭은 백천(白川)이다. 짚이는 데가 있어 ‘내친김에 허둥지둥 그 여자의 집으로 달려갔다.’ ‘방올음산 꼭대기에 걸린 달도 허둥지둥 따라왔다.’ 여기서 시인의 증언을 옮기면, ‘그 여자’는 마을에 온갖 염문을 뿌리며 50년대를 살다간 선무당으로 실존인물이며 당시 나이는 40세 전후로 추정하였다. 그러니까 이 ‘사건’의 소문을 들은 시인 자신의 나이도 열 살 남짓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선무당과 고향마을 종의 형상을 닮은 ‘방울음산’은 시인의 다른 시에도 등장한다. 어쨌거나 ‘댓돌 위엔 반듯 누운 옥색 고무신’속을 들여다보기까지 꽤나 긴장된 시간이 흘렀다. 동시에 그 반듯 누운 고무신을 본 순간 이미 아내는 열패감에 사로잡힌다. ‘아니나 다를까 달빛에, 달빛가루 같은 흰내의 모래가 오지게도 들었구나’ 소문의 진상을 확인한 것이다. 남편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순간이다. ‘내 서방을 다 마셨구나. 남의 농사 망칠 년이!’ 남편의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겼음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소문의 꼬리가 잡혔다’지만 몸통은 누구도 알지 못한 채 ‘한 줌 달빛’만 교교히 흐른다. 그들의 ‘간통’도 신화로 물들어 갔다.

 

 

권순진[대구에 계시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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