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崔氏東山草堂[최씨동산초당]

돌지둥[宋錫周] 2023. 7. 11. 01:26

崔氏東山草堂[최씨동산초당]  杜甫[두보]

최씨네 동산의 초당

 

愛汝玉山草堂靜[애여옥산초당정] : 그대는 옥산 초당의 고요함을 사랑하나니

高秋爽氣相鮮新[고추상기상선신] : 높은 가을 상쾌한 기운이 새로 곱게 따르네.

有時自發鐘磬響[유시자발종경향] : 제때에 스스로 일어나 종과 경쇠가 울리며 

落日更見漁樵人[낙일갱현어초인] : 지는 해에 어부와 나뭇꾼이 다시 나타나네.

盤剝白鴉谷口栗[반각백아곡구률] : 쟁반에 백아 골짜기 입구의 밤을 깎아 놓고

飯煮靑泥坊底芹[반자청니방저근] : 청니방 아래의 미나리를 삶아서 먹는다네.

何爲西莊王給事[하위서장왕급사] : 어찌하면 서쪽 장원의 왕급사를 다스리어

柴門空閉鎖松筠[시문공폐쇄송균] : 사립문 헛되이 닫고서 송과 대나무 가두었나.

 

白鴉谷[백아곡] : 지명. 초당 근처의 지명으로 밤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靑泥坊[청니방] : 지명.

 

두보가 최씨의 초당을 방문하여 주변의 경관을 통해 느낀 한적한 운치와

이웃한 西莊[서장]의 왕유에 대한 감회를 적은 시이다.

앞의 〈九日藍田崔氏莊[구일남전최씨장]〉과 연결되는 시편으로

저작시기 역시 건원 원년(758년)으로 추정된다.

최씨는 왕유의 외숙의 아들인 崔季重[최계중]으로 왕유의 망천별장과 동서로 이웃하고 있었다.

왕유는 만년에 宋之問[송지문]의 남전 별장을 얻었는데 망천의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왕유는 안녹산의 난 때 붙잡혀 낙양의 普施寺[보시사]에 구금되었다.

후에 숙종이 장안으로 돌아온 뒤 안녹산을 따른 사람들을 처벌하였는데,

왕유는 그의 시와 아우 縉[진]이 벼슬을 받치고서 죄를 대속받은 까닭으로

太子中允[태자중윤], 中書舍人[중서사인]이 될 수 있었고 다시 給事中[급사중]에 배수 되었다.

시의 문맥을 살펴보면 왕유가 망천별장에 살다가 조정에 벼슬 살러가면서

마침내 문을 닫아걸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가두어 두었을 것이다.

동산은 곧 藍田山[남전산]이며 또 玉山[옥산]이라고도 하는데, 장안 남전현의 동남쪽에 있다.

마지막 연은 西莊[서장]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벼슬하는 것이 은둔하는 것만 못함을 밝히고

왕유가 벼슬을 그만두고 남전으로 돌아와 노후를 보낼 것을 권계한 것이다.

아마도 최씨 초당의 정취가 바로 왕유가 살던 서장의 정취와 같았을 것이다.

시에서는 최씨의 초당을 읊지만 두보의 마음은 왕유의 서장에 가 있었으니,

이런 낙토가 있는데 어찌하여 돌아오지 않는가라는 뜻이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