絶命詩[절명시] 李萬敷[이만부]
절명시
此月常來守我窻[차월상래수아창] : 이 달빛이 항상 돌아와 나의 창을 지켜주며
有時淸影廢油缸[유시청영폐유항] : 제 때에 맑은 그림자 기름 항아리에 멈추네.
若逢月往諸公案[약봉월왕제공안] : 만약에 달을 이따금 여러분 책상에 만나면
知我心如此月光[지아심여차월광] : 나의 마음의 달빛인 줄을 알아 반겨 주시게.
李萬敷[이만부,1664-1732] : 자는 仲舒[중서], 호는 息山[식산]
1678년(숙종 4) 15세 때 송시열의 극형을 주장하다가 濁南[탁남]에게 몰려
北靑[북청]에 유배된 아버지를 따라가 그곳에서 여러 해 동안 시봉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 뒤 아버지가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왔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오직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여러 대를 서울에서 살았으나 영남의 학자들과 친분이 있는 관계로
그곳에 移居[이거]하여 후진 양성과 풍속교화에 힘쓰며 저술활동을 하였다.
임자년(1732년) 12월 17일 밤에 가족 그리고 지인들과
이승에서 나누는 마지막 장면을 인상적으로 그리고 있다.
자손들에게는
‘신중함으로 본분을 지켜 사람들과 함부로 사귀지 말 것’을
당부한 유언을,
제자들에게도 여타 당부의 말을 남겼다.
임종에 이르자 아녀자들을 모두 물리치고
이승에서의 마지막 말 대신 위의 7언절구 절명시를 읊었다.
그리고 다음날 18일 아침에 방청소를 깨끗이 하고
상과 요를 잘 정돈하라 하고는 잠시 후 세상을 버렸다.
絶命詩[절명시]는 보통 자신의 죽음이 가장 임박했을 때 쓰기 때문에
이것을 쓴 후 소생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몸과 정신이 극도로 쇠약해져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절명시의 韻[운]자가 틀린 것이 마음에 걸려서인지 제자들에게
"절명시의 韻字[운자]를 틀림없이 고쳐 써서 여러 곳에 널리 보내거라"면서
교정을 청하는 과정은 엄숙하기 그지없다.
참고로 그의 마지막 염려대로 ‘江[강]’{窻, 缸)과 ‘陽’(光) 2가지 운자를 사용하였으나,
다행하게도 노래의 높낮이와 음운(압운자)의 발음이 비슷해 전혀 거칠게 없다.
息山集[식산집] 息山先生文集附錄[식산선생문집부록] 上[상]
盧啓元[노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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