次鄭文孚令公韻[차정문부령공운] 蓀谷 李達[손곡 이달]
정문부 영공의 운을 차하여
離人何處起離愁[이인하처기리수] : 떠나려는 사람은 어디서나 이별의 슬픔이 일어
江木隨風葉盡流[강목수풍엽진류] : 강의 나무는 바람을 따라 잎을 모두 흘려버리네.
遼塞遙連山色晩[요새요련산색만] : 요새는 멀리 아득히 잇닿았고 산 빛은 황혼인데
朔雲高送雁聲秋[삭운고성안성추] : 구름 생겨나 멀리 보내니 기러기 소리 시름겹네.
三年尙抱馬卿病[삼년상포마경병] : 삼 년동안 사마상여의 소갈병 아직도 품으며
千里還登王粲樓[천리환등왕찬루] : 천 리 밖에서 왕찬의 망루에 다시 올라보네.
去國懷鄕回首望[거국회향회수망] : 서울 떠나 고향을 그리며 머리 돌려 바라보니
碧天無際水悠悠[벽천무제수유유] : 푸른 하늘 끝이 없고 강물 아득히 한가롭네.
鄭文孚[정문부 :1565(명종 20)-1624(인조 2)] 조선 중기의 문신, 의병장. 자는 子虛[자허], 호는 農圃[농포].
1590년 함경북도병마평사가 되어 북변의 여러 鎭[진]을 순찰, 임진왜란 때 1592년 회령에서
叛民[반민] 鞠景仁[국경인]이 臨海君[임해군], 順和君[순화군] 두 왕자와 이들을 호종하던
金貴榮[김귀영], 黃廷彧[황정욱], 黃赫[황혁] 등을 잡아 왜장 加藤淸正[가등청정]에게 넘기고 항복하자,
이에 격분해 의병을 조직하여 국경인과 국세인을 죽이고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여러 읍과 진을 수복했다.
이어 10월말 경 길주 장평과 쌍포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듬해 1월 野人[야인] 번호를 격파하고,
2월초에는 백탑교에서 가토의 일본군을 대파해 관북지역을 수복했다.[북관대첩] 1600년 용양위부호군,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의 전공을 보고해주는 사람이 없어 논공행상에는 제외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전주부윤이 되었다가, 1624년 李适[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부총관으로 다시 기용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했다. 그해 10월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令公[영공] : 令監[영감], 조선시대 종2품·정3품 당상관의 품계를 가진 관인을 높인 칭호.
離愁[이수] : 離別[이별]하는 슬픔, 이별의 슬픔.
馬卿[마경] : 마경은 司馬相如[사마상여]를 가리킨다. 상여의 자는 長卿[장경]이므로 성에서 馬[마]를 자에서 卿[경]을
따서 합하여 부른 것이다. 그는 消渴病[소갈병]이 있어 언제나 병을 칭탁하고 한가히 살았다.
漢書[한서] 57권 司馬相如傳[사마상여전].
王粲[왕찬 : 177~-217] 자는 仲宣[중선], 山陽[산양] 高平[고평] 사람, 魏[위]의 文士[문사]로 벼슬은 시중에 올랐으며
천재 蔡邕[채옹]이 인정한 인물이다. 劉表유표]의 문사였으나 자기의 뜻을 펼 수가 없어서 다락에 올라가서
登樓賦[등루부]를 지었다. 유표의 사후 괴월과 함께 유종을 설득하여 曹操[조조]에게 형주에서 항복하였다.
士風[사풍]이 높고 문사의 묘미가 극치에 이르렀다. 建安七子[건안칠자]의 한사람.
蓀谷詩集卷之四[손곡시집권지4] 七言四韻[7언4운] 1618간행본 인용
한국고전번역원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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