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재촉하다 [이규리]

돌지둥[宋錫周] 2016. 7. 16. 18:13

 

          재촉하다   [이규리]

 

브래지어에서 출발하는 사춘기도 있다.

 

가족들이 집을 비운 사이,

서랍 속에 접어 둔 언니의 봉긋한 브래지어는

내가 꿈꾼 조숙하고 달콤한 흥분이었다.

 

겨우 밤톨만한 젖멍울이 생겼을 뿐인 내 가슴을

단숨에 수식했던 브래지어의 황홀을, 밤마다 나는 재촉했다.

 

내 가슴이 부풀어 저 브래지어의 우듬지에 닿기를,

분홍빛 유두가 살며시 끝을 향해 긴장해 있기를,

그러나 재촉했던 지식,

재촉했던 사랑처럼 내 가슴은 그리 빨리 부풀지 않았고

언니의 에로틱한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는 겉돌았다.

 

자라지 않은 가슴과 팽팽하게 솟은 브래지어 사이의 공간만큼

나는 일찍부터 공허 같은 걸 품고 다닌 게 아닐까.

 

 어디를 휘돌아 나왔는지

언덕과 낭떠러지를 가졌던 내 안의 길에서 밀어 올렸던 꽃대,

재촉했던 꽃은 오다가 자지러져 꽃턱에 걸렸다.

 

아직도 재촉할 희망이 있는가.

 

끝없이 채우려 했던 내 안의 곳간들 더욱 비어 있고

이제 우듬지에 닿았던 유두가 조금씩 빈틈을 가지지만

빈틈으로 보이는 안과 밖,

어쩌면 나는 오래 전에 분홍빛 꽃이었는지 모른다.

 

- 시집 "앤디 워홀의 생각" [세계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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