童蒙詩[동몽시] 金汝岉[김여물]
君無欺我以爲欺[군무기아이우기] : 그대 속이지 않았지만 난 속였다 다스리고
我不受欺君自欺[아불수기군자기] : 내가 속지 않았다면 그대 스스로를 속인거네
欺人不得反欺己[기인부득반기기] : 남을 속이지 못하고 반대로 자기만 속였으니
欺己欺人俱是欺[기기기인구시기] : 자기를 속이나 남을 속이나 속이는건 마찬가지.
金汝岉[김여물,1548-1592] : 자는 士秀[사수], 호는 披裘子[피구자]
또는 畏菴[외암], 시호는 壯毅[장의]. 12세에 지은 시.
忠州都事[충주도사], 담양부사를 거쳐, 1591년에는 의주목사로 있었으나,
서인 鄭澈[장찰]의 당으로 몰려 파직,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의 용맹과 재능을 눈여겨본
유성룡의 추천으로 도순변사 신립의 종사관이 됐다.
시인은 숫자가 많은 적과 전면전을 벌이기보다
요새를 지키자고 했지만, 신립은 말을 듣지 않고
충주 달내에 배수진을 쳤다가 패한다.
신립이 시인에게 도망가겠냐고 묻자 시인은 웃으며
“내가 어찌 목숨을 아낄 사람이겠소”라고 답한 뒤
탄금대로 말을 달려 왜군 수십 명을 죽인 뒤 강물에 투신했다.
(‘東國新續三綱行實圖’,‘汝岉赴水’)
시인은 전투 전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아들 김류에게 보낸 편지에 삼도(三道)에서
한 명의 구원병도 오지 않았지만,
남아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일이라고 썼다.
시인을 높게 평가했던 송익필은
시신조차 매장할 수 없게 된 장렬한 죽음을 비탄해 마지않았다.(‘聞金士秀戰歿不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