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유, 한유

題桃花夫人庙[제도화부인묘]

돌지둥[宋錫周] 2020. 6. 26. 08:21

息夫人[식부인]     王維[왕유]

 

莫以今時寵[막이금시총] : 오늘날 총애를 받는다 하여 

能忘舊日恩[능망구일은] : 능히 옛날의 은혜 잊는다 마오.

看花滿眼淚[간화만안루] : 꽃을 보아도 눈에 눈물만 가득

不共楚王言[불공총왕언] : 초왕과는 말도 함께하지 아니했네.

 

息夫人[식부인]의 얼굴은 당대에 비길 만한 것이 없고, 눈은 秋水[추수]와 같고,

얼굴은 桃花[도화]같아 '桃花夫人[도화부인]'이라고 부른다.

일설에는 출생하는 그날에 桃花[도화]가 모두 피었으므로 '桃花夫人[도화부인]'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죽은 뒤에는 桃花夫人庙[도화부인묘]에 묻었으므로 桃花庙[도화묘]라고 하였다.

지금 河南[하남] 信陽[신양] 息縣[식현] 武漢[무한] 黄陂[황피]에 있다. 

杜牧[두목] 息夫人[식부인] 題桃花夫人庙[제도화부인묘]

 

春秋時代[춘추시대] 楚[초]나라는 중원의 다른 제후국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으며

지리적으로 周[주]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금의 사천성을 포함한 남쪽지역이다.

초기에는 周 文王[주 문왕]을 섬겼고 成王[성왕]에 의해 초나라만 지방을 봉지로 받아 남작이 되었는데

주나라가 夷王[이왕] 때부터 혼란스러워지자 초는 주나라로부터 떨어져 독립을 선언했다.

熊渠[웅거]는 스스로 선포하기를

“나는 오랑캐 지역에 있으니, 중원 여러 나라들 같은 국호와 시호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큰아들 웅강으로부터 王[왕]으로 부르게 했다.

초나라 스스로가 중원의 제후국들과는 나라의 격이 다름을 천명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제후국들 쪽에서도 초나라를 오히려 오랑캐의 나라로 여겨 중원에 나타나는 것을 꺼려했다.

여러 나라에서 군주의 시해가 유행하던 무렵 초나라가 강성하여 중원을 넘보기 시작했다.

楚 武王[초무왕]은 제후국인 隨[수]나라를 정벌하면서 존재감을 알렸지만 주나라는 초를 인정하지 않았다.

초는 스스로 땅을 넓히면서 자존감을 과시하는 전략을 썼다.

무왕의 아들 文王[문왕] 때에 이르러 長江[장강] 漢水[한수] 유역에 있던 나라들이 초나라 위협을 받게 되었다.

 

초나라가 蔡國[채국]과 息國[식국]을 정복하며 諸侯國[제후국]으로 등장하였는데

초 문왕이 蔡[채]와 息國[식국]을 정복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좀 색다르다.

陳[진] 제후의 딸들이 예뻤는데, 큰 딸이 채나라 군주 哀侯[애후]에게 시집을 간 뒤에,

그 동생 嬀[규]는  息國[식국]으로 시집을 가기 위해 채나라를 지나게 되니,

蔡 哀侯[채애후]가 그녀를 위하여 융숭한 축하연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호색가 애후는 절세미인인 것을 보고는 그녀가 처제라는 사실을 잊고서 추근거렸다.

 

식나라로 들어간 규는 남편인 息侯[식후]에게 哀侯[애후]의 행패를 하소연했지만 식은 약소한 나라였다.

식후가 나름으로 꾀를 내어, 강성해진 초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채나라를 아예 멸망시키고자 했다.

식후는 초문왕에게 전갈하길

“대왕께서 채나라를 정벌할 기회가 왔습니다. 우선 대왕께서 저희 식나라를 치는 척하고 출동하소서.

그러면 제가 채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터인즉,

채나라가 출동한 뒤에 채로 진격하시면 손쉽게 채를 정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초 문왕은 채나라에 본때를 보이고 싶은 참이라 선뜻 응하여 출동한 뒤에,

식후가 거짓으로 채나라에 도움을 청하자 애후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군을 몰아 출동했다.

同棲[동서]지간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필경 아름다운 처제에 대한 그리움 탓이 더 컸을 것이리라.

초나라는 텅 빈 채나라를 공략했고 되돌아온 채나라 군대를 무찔러 애후를 사로잡았다.

애후는 목숨만 부지한 채 초나라에 9년이나 억류돼 있다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죽었다.

 

史記[사기]가 전하는 식부인 사건은 여기까지지만,

春秋左傳[춘추좌전]이나 管子[관자] 등 여러 기록에 그 뒤의 전말이 전해온다.

채 애후는 초나라에 잡혀있는 동안 식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보복을 꾀하려

초 문왕에게 

“제가 이때껏 본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아마도 식후의 부인 규일 것입니다.

천상선녀가 따로 없지요. 대왕께서도 보신다면 제 말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이에 초 문왕은 식부인을 한번 보기라도 하고 싶어서 巡視[순시]를 구실로 식나라를 찾아갔다.

식후가 맹주에 대한 예의로 영접하자 문왕은 식부인의 용모를 직접 보니 넋을 빼앗길 만한 미모에 

마음이 동하여 식후를 사로잡고 그 부인을 취했다.

부인은 남편과 식나라를 살리기 위해 문왕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문왕의 첩이 되어 두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억지로 두 남편을 섬기고는 스스로 수치스러워 평생 입을 다물고 살았다고 한다.

 

능력 없는 남자에게 천하절색의 아내란 분에 넘치는 福[복]일지도 모른다.

천하의 한량들을 설레게 하는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약소한 남편을 둔 여인에게는

그 절개를 지키기도 어려운 게 세상 이치인 듯도 하다.

한 사람의 미녀로 인해 두 나라가 파멸에 이른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는 변방국 초나라가 한수 넘어 북쪽의 제후국들과 어울려 경쟁하며

春秋五覇[춘추오패]의 하나로 등장하는 되는 분수령이기도 했다.

 

동아일보 칼럼에서 추가 인용합니다.

王維[왕유]가 오랜 역사 속 상처를 왜 새삼 들추어냈을까. 

唐玄宗[당 현종]의 친형 寧王[영왕]은 수십 명의 미녀를 곁에 둘 정도로 생활이 방탕했다.

하루는 어느 떡장수 아내의 미색에 반해 여자를 탈취해왔다.

1년이 지나 한 연회석상에서 영왕이 여자에게 물었다.

"아직도 남편을 그리워하는가?"

그간 영왕의 총애를 듬뿍 받았지만 여자는 묵묵부답,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영왕이 떡장수를 불러들였고 남편을 본 여자는 와락 눈물을 쏟아냈다.

연회에 모인 손님들이 이 애절한 장면을 목도하고는 동정을 금치 못했다.

분위기가 싸늘했지만 영왕은 개의치 않고 다들 시 한 수씩 지으라고 명했다.

첫 지목을 받은 이가 바로 왕유. 그는 떡장수 아내의 처지를 식부인에 빗대었다.

그대가 아무리 총애한들 남편을 향한 내 마음이 변할 리 있겠소? 그대와는 말도 섞기 싫소.

여자의 심정을 헤아린 시인은 영왕의 횡포를 이렇게 비꼬았다.

수채화처럼 담담한 산수시를 주로 읊었던 시인이지만 스무 살 젊은 시절에는 불의에 맞서는 이런 기개도 있었다.

시인의 용기 있는 비유 덕에 결국 여자는 남편 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