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들의 역사자료

洪州客館記[홍주객관기] 曺偉[조위]

돌지둥[宋錫周] 2019. 4. 24. 12:35


        洪州客館記[홍주객관기]  曺偉[조위]


俠城宋侯遙年[협성송후요년]以謹厚篤實之才[이근후독실지재]早登膴仕[조등무사]蜚英當世[비영당세]

호협한 성의 송공 遙年[요년]은 조심스레 중후하며 독실한 재질로 일찍이 좋은 벼슬에 올라 시대에 이름 날리고


嘗倅西原[상시서원]守沔陽[수면양]牧尙州[목상주]皆有惠政[개유회정]至今有去後思[지금유거후사]

일찌기 서원 수령, 면양 군수, 상주 목사를 역임하며 모두 자비로운 정사 베푸시어 지금도 그를 칭송함이 있네.


成化丙午[성화병오]又出爲洪州牧[우출위홍주목]洪[홍]湖西之巨邑[호서지구읍]

성화 병오[1486]년에 또 홍주 목사기 되어 나오시니 홍주는 호서의 큰 고을이니


其地沃以廣[기지옥이광]其民繁以庶[기민번이서]號稱難治[호칭난치]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은 번성하여 많아서 다스리기가 어려운 고을로 일컬어 왔습니다.


侯用仁恕平易[후용인노평이]簡敎條去煩苛[간교조거번가]闔境晏然[합경안연]民樂爲用[민락위용]

송공은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고 친근하게 접하는 정책을 써서 권유나 지시 등의 조목을 간략히 하고,

번거로운 정령과 까다롭고 자잘한 것 털어 없애니, 온 경내가 안온하여 백성들이 일을 시켜도 즐거워하였다.


一日[일일]坐後廳按簿書[좌후청안부서]謂通判曺侯末孫曰[위통판조후말손왈]

 하루는 뒷 청사에 앉아 장부와 서류를 살펴보시고는 通判[통판] 曺侯[조후] 末孫[말손]에게 말하기를,


廨宇[해우]所以待賓客[소이대빈객]而大廳[이대청]乃朝朔望之正衙也[내조삭망지정아야]

'관아 청사는 빈객을 접대하는 곳이며 대청은 곧 삭망으로 조회하는 바른 관청인데


地勢卑下[지세비하]無廉陛之嚴[무영폐지엄]制度狹隘[제도협액]無行禮之所[무행례지소]

지세가 낮아 위계질서의 위엄이 없고, 제도가 협소하여 예를 행 할 곳이 없는데다가


歲月浸深[세월침심]摧圮將至[최비장지]盍改而新之[합개이신지]以起曠古之廢[이지광고지폐]

세월이 오래되어 장차 꺾이고 무너질 것이니 어찌 이를 고쳐 세워 오랫 동안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지 않는가.


通判曰[통판왈]謹唯命[근유명]

통판이 이르길 '삼가 명을 따르겠습니다.'


議以克合[의이극합]於是[어시]鳩材伐石[구재벌석]役以游手[역이류수]告成於己酉春[고성어기유춘]

삼가 합의를 보며 이에 재목을 모으고 돌을 캐는 데 노는 사람을 이용하여 기유년 봄에 그 낙성을 고하게 되니


向之卑者高[향지비자고]狹者廣[협자광]

지난날 낮았던 것이 높아지고 좁았던 것이 넓어졌다.


峻其廉陛[준기렴폐]而恢其規制[이회기규제]塗墍丹雘[도기단확]

그 위계 질서를 높이고 규모와 제도를 확장하고 흰 회로 바르고 붉은 진사로 꾸며,


輪焉奐焉[윤언환언]爲一州之美觀[위일주미관]

높고 또 미려하여 한 고을의 미관을 이루었다.


侯馳書於京[송후치서어경]徵余言爲記[징여언위기]余復之曰[여복지왈]

송공께서 서울로 편지를 띄워 나의 말로 기문을 삼고자 하므로 나는 답하기를,


侯之華聞[후지화문]早播朝著[조파조저]繼占金榜[계점금방]

송공의 빛나는 소문이 일찍부터 조정 위에 전파되었고, 이어 金榜[금방]에 이름이 올랐으니,


當立登要路[당입등요로]出入臺閣[출입규각]

마땅히 요로에 올라 대각에 출입할 것인데도


以親之故[이친지고]累乞外補[누걸외보]

늙으신 어버이가 있는 까닭으로 누차 지방관으로 전보를 청하여


低徊州郡[저회주군]以盡滫瀡之養[이진수수지양]

여러 州郡[주군]으로 배회하면서 깨끗하고 기름진 봉양을 다하였으니,


此侯之至孝出於天性者也[차후지지효출어성자야]

이는 송후의 지극한 효성이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이요,


不用鉤距而民不忍欺[불용구거이민불인기]

캐고 들추어 내지 아니하여도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고,


不任搏擊而吏皆慴伏[불임박격이리개습복]。田廬無愁歎之聲[전려무수탄지성]

치고 때리지 않아도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심복하여 촌간에서는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없으며


四境有含哺之樂[사경유함포지락]

온 고을 경내가 풍족하고 즐거워하니


此侯之政績異於列邑者也[차후지정적리어렬읍자야]

이는 송후의 공적이 여러 고을과 다른 점이다.' 하였다.


事親之孝[사친지효]治郡之能[치군지능]固當書于史策[고당서우사책]不一而足[불일이족]

어버이를 섬기는 효성과 고을을 다스리는 재능은 진실로 사기에 기록하여 전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니


今茲一土木之役[금자일토목지역]一廨宇之營[일해우지영]何足爲侯道哉[하족위후도재]

이제 한 토목 공사와 한 청사를 짓고 수리함이 어찌 송후를 칭찬하기에 충분하겠는가.


雖然[수연]余於是蓋有所感焉[여어시개유소감언]比觀州郡[차관주군]

비록 그러나 내 여기서 느낀 바 있으니, 요즈음 각 주군을 살펴보건대,


自近以來[자근이래]擧皆一新[거개일신]

 근년 이래 거의 모두 일신하게 중수하여


傾陊頹圮[경치퇴비]十無二三[십무이삼]其制作皆宏壯華麗[기제작개굉장화려]倍蓰於舊[배사어구]

기울고 무너진 것이 열에 둘 셋도 없을 뿐더러 그 제작한 것이 모두 굉장하고 화려하여 옛것의  갑절이 되었으니


豈昔之匠石[기석지장석]皆昧於矩矱[개매어구확]而今之梓人[이금지재인]皆般郢之巧耶[개반영지교야]

어찌 옛 장인 석공은 다 법도에 어둡고 지금 목공 재인은 모두 般郢[반영]의 교묘한 수법이 있어 그러하겠는가.


此良由朝廷淸明[차랑유조정청명]中外無事[중외무사]民安物阜[민안물부]事力有裕故也[사력유유고야]

이는 조정이 청명하고 안팎이 무사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물산이 성하여 사세와 재력에 여유 있게 된 까닭이요,


昔之營搆者[석지영구자]僅乘干戈之隙[근승간과지극]故草創如彼[고초창여피]

옛날에 경영한 구조란 겨우 병란이 없는 틈을 타서 하였기에 그 사업을 시작함이 저와 같았으나,


今之有爲者[금지여위자]從容閑暇[종용한가]得盡其力[득진기력]故宏麗如此[고굉려여차]

오늘에 하는 자는 종용하고 한가하여 그 역량을 다할 수 있기에 그 굉장하고 화려함이 이와 같은 것이니


豈非關於世道之興替而然耶[기비관어세도지흥체이연야]

어찌 세상 도리의 성하고 쇠함에 관계되어 그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然則一廨宇之營[연즉일해우지영]於侯雖無增損[어후수무증손]

그렇다면 한 관아 구역의 경영이 송후에게는 비록 이익도 손실도 없을 것이지만


而上可以觀國家之昇平[이상가이관국가지승평]

이로써 위로는 가히 나라의 태평하게 오를수 있을 것이요.


次可以知牧守之賢能[차가이지목수지현능]烏可少之哉[오가소지재]

다음으로는 또한 수령의 현명하고 재간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이를 어찌 적게 평가하랴.


後之人[후지인]亦當目覩制作[적당목관제작]思侯之賢[사후지연]而想今日之盛矣[이상금일지성의]

뒤에 오는 사람들도 이 제작한 바를 보고 송후의 어짊과 오늘의 융성을 상상할 것이니,


侯之是擧[후지시거]顧不美歟[고불미여]

송후의 공적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리오.


余於宋侯[여어송후]子弟行也[자제행야]

나는 송후 자제들과 같은 반열이다.

 

辱書再至[욕서재지]義不可辭[의불가사]姑書此以歸云[고서차이귀운]

그런데 글을 내리심이 두 번에 이른지라 의리로 보아 사양할 길이 없어 우선 이것을 써서 보내드리는 바이다.


般郢[반영] : 公輸般[공수반]郢人[영인], 공수반은 춘추 시대 魯[노]나라 사람으로 巧工[교공]으로 유명.

                 郢人[영인]은  楚[초]나라 사람을 말한다. 郢[영]은 초나라의 도성.


梅溪先生文集卷之四    [매계선생문집4권] 記[기] 1883년 간행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