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글

李玉峰[이옥봉]

돌지둥[宋錫周] 2015. 2. 7. 08:16

옥봉(玉峰)의 이름은 원(媛). 옥봉은 그녀의 호이다. 일반적으로 이옥봉이라 부른다. 옥봉은 조선 선조(宣組)의 생부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으로 충북 옥천군수를 지냈던 이봉(李逢)의 서녀였었다. 비록 서녀였지만 옹손으로서 그녀의 가계는 당당했고 또 지위도 높았다.
옥봉는 출가했다가 일찍 남편을 여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번 결혼했던 여성은 재혼할 수 없었다. 왕손이라도 불가능했다. 여성이 재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재혼하게 되면 파문을 당하고 파멸은 면치 못했다. 그래서 왕손이었던 옥봉도 재혼은 불가능했다. 그녀가 서녀 출신이어도 양반의 후손 아닌 왕손이었으므로 더욱 그랬다.
옥봉는 수절하면서 고독을 달랬다. 그녀는 다행이 시문(詩文)에 능했기 때문에 시를 짓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다. 옥봉의 시는 또 재기발랄한 풍류를 갖추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그녀의 시가 우연히 승지벼슬까지 하게 된 조원(趙瑗)에게 알려졌다. 조원은 시로써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옥봉에게 조원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자연히 왔다. 그때 조원의 늠름한 모습에 반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생겼다. 홀로 되어있던 옥봉은 체면불구하고 조원에게 부실(副室·첩)이 되기를 청했다. 그러나 선비의 법도에 철저했던 조원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옥봉과 조원의 사랑과 풍류는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옥봉과 조원의 사랑은 맺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극적으로 사랑은 맺어졌다. 조원의 장인(李俊民, 1,524∼1,590) 사위에게 옥봉을 부실로 맞아들이도록 한 것이다. 옥봉과 조원의 사랑은 조선시대에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옥봉이 강원도에서 출생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삼척과 영월과는 출생관계의 연고가 없는데도 강원의 여성으로 알려지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한때 삼척에서 살았다는 것이 그것이며 다른 하나는 삼척과 영월에 대한 시문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옥봉을 부실로 맞아들였던 조원은 호를 운강(雲江)이라 했다. 선조6년(1575) 정언(正言) 벼슬에 있던 그는 당쟁의 폐해를 상소하고 파당을 짓는 자들을 벌주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선조16년(1538년) 삼척부사를 지냈고 후에 승지까지 올랐다. 삼척부사로 조원이 부임했을 때 옥봉은 그를 따라와 삼척부중에서 살았다. 그래서 삼척부사의 부실이었던 그녀가 삼척부기(三陟府妓)로 와전되었던 것이다. 삼척부기로 알려진 것은 몰론 영월 여성으로서 알려진 것도 와전된 것이었다.
삼척부기, 삼척여성으로 알려지게 된 또 한 가지의 이유는 그녀가「죽서루시(竹西樓詩)」를 남겼고 「영월도중시(寧越道中詩)」남겼기 때문이다. 남편 조원을 따라 삼척으로 올 때 영월에 들르게 된다. 그때 단종릉을 지나던 회포를 읊은 것이 유명한「영월도중시」이다.『닷새거리 대관령을 사흘만에 넘었네/ 애통하는 시를 읊으니 노릉의 구름 다 걷히네/ 첩의 몸도 조선왕실의 손녀/ 여기 접동새 울음을 차마 듣기 어렵다네』대관령을 넘어 단종릉을 참례하고 조선왕실의 비극을 거기에서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남편을 잃고 재혼하여 삼척으로 내려오는 자신의 신세를 이「영월도중시」로써 소회를 풀었을지도 모른다. 죽서루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유일하게 바다를 향하지 않고 산으로 향하여 고생창연한 풍광을 자랑한다. 옛부터 시인 묵객이 죽서루를 찬양하는 시문을 무수히 지었다. 고려시대 간관으로 삼척 구동에서 출생, 「제왕운기」를 지었던 이승휴(李承休)가 죽서루에 올라 지은 시로부터 고려를 거쳐 무수히 창작된 조선시대 한시에 이르기까지 옥봉의「죽서루시」를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평이다. 옥봉의「죽서루시」는 그만큼 유명했고 또 찬사를 받았다.
그래서 옥봉이 더욱 삼척부기로, 삼척여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죽서루 시편은 짧으면서도 자연과 인생과 우주를 포괄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읊었다. 『강에 잠긴 갈매기의 꿈은 넓고도 넓고 하늘을 나는 기러기의 시름은 길기도 하네』 오언절구 열자에 옥봉은 죽서루 풍광을 형이상학적으로 끌어올렸고, 자기의 이생까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죽서루를 읊은 시중에 이만한 춤격과 이만한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이 없다. 그래서 옥봉은 더욱 위대하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옥봉의 긴면목은 사랑의 시에서 동서구금을 통틀어 독보적인데 있다. 옥봉의 사랑의 시만큼 간절하고 정열적이고 혼이 가득찬 것이 없다. 옥봉은 이웃에 살던 남자가 소도둑질을 하다가 관가에 끌려간 뒤 그 아내되는 여인이 애가 타서 눈물로 지새우는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의 슬픈 신세를 글로 적어 주었다.
그 간절한 글을 보고 관원이 석방해 주었다. 이 사건을 남편 조원이 알게 되어 부녀자가 함부로 공사에 관여한다고 옥봉을 내보냈다. 옥봉은 다시 사랑하는 남편 조원에게서 버림을 받았다. 버림을 받았으면서도 간절히 사랑을 읊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사창에 달이 뜨니 한만 서려요/ 꿈 속에서 오고 간 길 흔적이 난다면/ 그대 문 앞 돌길은 모래가 되겠네요』라고 읊었다. 얼마나 사랑이 간절했다면 꿈에 다니던 길의 돌들이 부서져 모래가 되었겠는가.
『온다던 그대 왜 이리 늦을까/ 뜰에는 벌써 매화가 지는데/ 까치가 운다 임이 오시려나/ 공연히 거울을 들고 눈썹 그리네.』
『평생에 이별의 한으로 병든 이 몸/ 술로 달래지 못하고 약도 안듣네/ 눈물이 물흐르듯 외롭고 차가운 잠자리/ 밤낮으로 적시는 줄 뉘라서 알리.』
옥봉은 사랑의 눈물을 흘리다 종적을 감추었다.
『내일 밤이야 짧든 말든 이 한밤만 길었으면/ 저 닭아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날이 새리/ 가실님 생각을 하니 눈물이 앞서노라.』

옥봉이야말로 한국 여성의 사랑과 소망을 읊은 사랑의 여인. 사랑의 여류시인이었다.


더 굉부허고 시픈 분은 아래글이 읽을만허당게요.
1. 임기연, 李玉峰 硏究, 成均館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92
2. 태선경, 李玉峯 漢詩 硏究, 延世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99
3. 金咸得, 歷代女流의 漢詩文, 國文學論集 10집, 檀國大學校 國語國文學科,1981
4. 박무영 外,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돌베게, 2004
카페 농부네 인터넷 도서관, 글쓴이 쇠똥구리  퍼온글.

  

이옥봉의 일화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부친이라 대답하니,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랐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 지 40여 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옥봉의 시집이 어떻게 해서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게 되었는지 조희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로대신이 들려 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 전쯤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 읽어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온 몸을 시로 감고 죽은 여인 이옥봉.

이옥봉은 조선 명종 때 충청도에서 왕족의 후예 이봉지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옥봉은 신분의 굴레로 첩살이밖에 못함을 알게 되자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서울로 갔다. 옥봉은 장안의 내로라하는 명사들과 어울리며 단종 복위운동에 뛰어 들었고, 곧 싯귀나 짓는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옥봉은 조원이란 선비를 사랑하여 첩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첩살이가 싫어 결혼을 거부했던 그녀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해진 모양이다. 그런데, 조 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대신 앞으로는 절대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했다. 여염의 여인이 시를 짓는 건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라면서. 옥봉은 맹세했다. 자신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달라고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 수를 써 보냈고, 산지기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뚝섬 근처에 방 한 칸을 얻어 지내며 옥봉은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을 억눌러 오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 수 지어준 일로 쫓겨나다니, 옥봉으로서는 야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리라.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 읊었다. 더 이상 참을 까닭이 없었으니까.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 : 平生離恨成身病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 : 酒不能療藥不治

이불 속 눈물이야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아 : 衾裏泣如氷下水

밤낮을 흘려도 그 뉘가 알아주나 : 日夜長流人不知

 

조원을 단념한 옥봉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중국으로 가 마음껏 시심을 펴 보려 했나 보다. 그리고 자신의 시로 몸을 감고 낯선 바다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여성을 가정 내 존재로 규정하고 그 틀을 벗어나는 여성은 천시하거나 사회적 보호 밖에 두었던 조선시대의 여성관에 죽음으로 항의한 셈이다. 사랑을 위해 시를 포기했지만 자신의 삶은 결국 시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침묵으로 웅변하면서.

퍼온글 : 블로그> My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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