題季文蘭詩後[제계문란시후] 洪世泰[홍세태]
계문란의 시 뒤에 쓰다.
文蘭[문란]江州秀才虞尙卿妻也[강주수재여상경처야]年二十一[년이십일]
被虜淸兵[피로청병]爲瀋陽王章京所買[위심양왕장경소매]
路經榛子店[노경진자점]題詩壁上曰[제시벽상왈]
문란은 강남 고을의 수재 여 상경의 아내로 나이 21살이었다.
청나라 병사에게 사로 잡혀 심양의 왕장경에게 팔려가게 되면서
진자점을 지나는 길에 벽 위에 시를 쓰기를
椎髻空憐昔日粧[추계공련석일장] : 순박한 머리 헛되이 옛날의 단장 가련하고
征裙換盡越羅裳[정군환진월라상] : 길 가는 치마 모두 월나라 비단 치마로 바꿨네.
爺孃生死知何處[야냥생사지하처] : 부모님의 삶과 죽음을 어느 곳에서 알까나 ?
痛殺春風上瀋陽[통살춘풍상심양] : 봄 바람에 아픔 삼키며 심양으로 올라갑니다.
客自燕中得此詩來示余[객자연중득차시래시여]
余見而悲之[여견이비지]遂題之[축제지]
나그네가 연경 가운데에서 이 시를 얻어 돌아와 나에게 보여주니
나는 보고 슬픔이 일어 마침내 쓰게 되었다.
江南江北鷓鴣啼[강남강북자고제] : 강 남쪽과 강 북쪽에 울고있는 자고새
風雨驚飛失舊棲[풍우경비실구서] : 비 바람에 놀라 날다가 옛 거처 잃었네.
一落天涯歸不得[일락천애귀부득] : 하늘 끝 한 번 떨어져 돌아가지 못하니
瀋陽城外草萋萋[심양성외초처처] : 심양 성 밖에는 잡초만 무성하구나.
柳下集卷之七[유하집7권] 詩[시]
洪世泰[홍세태 : 1653-1725] 한역관,
일본과 청나라에서 시인으로 유명을 떨침.
홍세태가 젊었을 때 위의 시를 지어
淸城[청성] 金錫冑[김석주]에게 인정을 받아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高適[고적]과
岑參[잠삼]의 부류로 인정받기까지 하였다.
홍세태는 이씨 집안의 종이었다.
주인은 그가 농사일을 하지 않는 것을
괘씸하게 생각하여 잡아 죽이려고 하였는데,
청성이 속임수를 써서 그를 죽음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러나 銀子[은자] 200냥이 있어야 그
를 贖良[속량]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청성이 은자 100냥을 내고
동평군 이항도 은자 100냥을 내어 속량시켜 주었으니,
이항 역시 그의 재주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홍세태는 청성군과 동평군을
아버지처럼 여겼다.
農巖[농암] 金昌協[김창협]과
三淵[삼연] 金昌翕[김창흡] 형제도 그
의 재주를 사랑하여 賓友[빈우]로 대우하였다.
정승인 文谷[문곡] 金壽恒[김수항]이
기사년(1689, 숙종 15)에 당한 화는
기실 이항이 그를 해친 것이었다.
이항이 신사년(1701, 숙종 27)의 옥사에 처형될 때
김씨 형제들은 매우 통쾌히 여기고
그가 絞首[교수]되는 모습을 보러 나갔는데,
홍세태가 손수 이항의 시체를 염하여
그의 은혜에 보답하고는
천천히 농암에게 다가와 배알하고
그 까닭을 말하였다.
농암은 그의 의로운 행위를
가상히 여겨 더욱 후대하였다.
「자고사」는 청성이 季文蘭[계문란]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계문란은 강남의 양갓집 규수였는데,
집안이 오랑캐에게 전복되어
북쪽 심양으로 끌려가다가
榛子店[진자점]을 지나가게 되었다.
계문란은 진자점의 벽에 시를 써서
자신의 억울하고 괴로운 심사를 표현하고는,
마지막 줄에 ‘천하의 유심한 남자들은
이것을 보면 가엾게 여길 것이다.’라고 썼다
【注: 내가 진자점을 물어보았는데,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청성이 燕京[연경]에 사신으로 가다가
이곳에 들러 벽에 쓰여 있는 것을 보니,
먹색이 아직도 변함없었다.
店人[점인]에게 이것을 쓸 당시의 일을 물었더니,
‘騎兵[기병]은 문에 서서 갈 길을 재촉하고,
여인은 눈물을 삼키며 벽에 썼는데
오른손이 힘들면 왼손으로 계속 썼습니다.'
하며 매우 자세히 말해주었다.
청성은 이를 가엾게 여겨
그녀를 위해 칠언절구 한 수를 짓고
홍세태에게 여기에 화답하라고 명하였는데,
그의 시는 과연 뛰어난 작품이었다.
그 시는 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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