洛山寺[낙산사] 釋益莊[석익장]
낙산사.
海岸高絶處[해안고절처] : 바닷가 언덕 끊어져 뛰어난 곳에
中有洛迦峯[중유락가봉] : 가운데에는 낙가봉이 넉넉하구나.
大聖住無住[대성주무주] : 거룩한 성인 멈추지 않고 머물고
普門封不封[보문봉불봉] : 보문은 봉하지 않고서 봉했구나.
明珠非我欲[명주비아욕] : 아름다운 구슬 나의 욕망 아니오
靑鳥是人逢[청조시인봉] : 파랑새는 옳바른 사람이 만나네.
但願洪波上[단원홍파상] : 다만 원하기는 넓은 물결 위에서
親瞻滿月容[친첨만월용] : 몸소보름달 같은 용모를 보리라.
大聖[대성] : 가장 덕이 높은 성인, 지극히 거룩한 사람.
이 시에서는 산사 바닷가의 窟[굴]은
관음대사가 머무르는 곳이라 하는데,
佛法[불법]에는 居住[거주]함이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관음보살이 머물러도 머무르는 相[상]이 없다는 뜻.
普門[보문] : 부처가 설한 중도. 두루 갖춤, 두루 통함, 두루 융합함.
華嚴宗[화엄종]에서, 宇宙[우주]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일체의 법을 包攝[포섭]하고 있다는 것.
明珠[명주] : 고운 빛이 나는 아름다운 구슬.
신라 義湘[의상]법사가 낙산사 바다 돌 위에서 27일을
정성스럽게 기도하다가하다가 몸을 바다에 던지니,
동해의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 놓고 大聖[대성, 관음보살]이
굴 안에서 팔을 뻗쳐 손수 水精[수정] 염주를 주고
용도 또한 如意珠[여의주]와 옥을 바쳤는데, 절에 보배로 간직해 전해온다.
이 시의 작자 釋益莊[석익장]의 〈洛山寺記[낙산사기]〉에 이렇게 썼다.
여지승람 권44:襄陽[양양] 佛宇[불우]
東文選卷之九 [동문선9권] 五言律詩[오언율시]
釋益莊[석익장]은 고려 후기의 스님이란 내용 외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스님이다.
그런데 『동문선』(제27권 制誥[제고])에
‘익장 원이 담령 대헐을 모두 선사로 삼는 관고
[益莊元伊淡靈大歇各爲禪師官誥]’가 실려 있어
국가에서 선사의 직임을 내린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고’를 지은 사람이 이규보[1168-1241]이다.
익장스님이 활동하고 있을 때 내려진 문서로 본다면
이규보와 비교하여 120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승려로 보인다.
『동문선』에 시(‘낙산사’) 1수가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洛山寺記[낙산사기] 한 편이 전한다.
낙산사기는 낙산사의 창건설화를 주요 소재로 한 것이다.
고려 중 益莊[익장]의 기문에,
"襄州[양주] 동북쪽 강선역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두어 마장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 자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觀音大士[관음대사]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굴 앞에서 오십 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 신라 義相法師[의상]가 친히 佛聖[불성]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돌 위에서 展坐[전좌]拜禮[배례]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그래도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다.
大聖[대성]이 곧바로 속에서 팔을 내밀어, 水精念珠[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 꼭지 위다.
거기에다 佛殿[불전]을 짓고 像設[상설]을 안배하라.’ 하였으며
龍[용]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는바, 곧 이 절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봄가을에 사자를 보내 사흘 동안 재를 실시하여 치성하였고,
그 후에는 甲令[갑령, 항상 하는 일]에 적어서 恒規[항규]로 하였다.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보관해 두어 보물로써 전하게 하였다.
계축년에, 元[원] 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으므로
이 州[주]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절 奴[노, 종]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땅에 묻고
도망하여 조정에 고하였다.
침입군이 물러간 후에 사람을 보내 가져다가 內殿[내전]에 간수하였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사람이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배례하면
靑鳥[청조]가 나타난다.’ 하였다.
明宗[명종] 정사년에, 庾資諒[유자량]이 병마사가 되어
시월에 굴 앞에 와서 분향 배례하였더니,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幞頭[복두]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한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 44, 양양도호부조 불우 낙산사조)
『국역 동문선』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襄陽[양양] 佛宇[불우]에서는
낙산사 시를 庾資諒[유자량, 1150-1229]의 작으로 적었으나,
제6행 是人逢[시인봉]에 따르면 석익장의 시가 옳은 듯하다.’는 주석이 있다.
庾資諒[유자량, 1150-1229] : 자는 湛然[담연], 고려 후기에 판각문사, 지다방사,
상서좌복야 등을 역임한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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