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恒福

到靑坡[도청파]移配慶源[이배경원]

돌지둥[宋錫周] 2021. 7. 31. 08:09

到靑坡[도청파]移配慶源[이배경원]

又移三水[우이삼수]

正月九日[정월구일]改北靑[개북청]

延陵諸君携壺[연릉제군휴호]

送于山壇道左[송우산단도좌]

李恒福[이항복]

靑坡[청파]에 이르니, 慶源[경원]으로 이배시켰다가

또 三水[삼수]로 옮기었고,

정월 구일에는 北靑[북청]으로 고쳐 이배시켰는데,

延陵[연릉] 등 제군이 술을 가지고 와서

山壇[산단]의 길 곁에서 전송하였다.

 

雲日蕭蕭晝晦微[운일소소주회미] : 구름낀 날은 쓸쓸하고 한낮에도 어두컴컴한데
北風吹裂遠征衣[북풍취열원정의] : 북쪽 바람은 먼 길가는 이의 옷을 불어서 찢누나
遼東城郭應依舊[요동성곽응의구] : 요동의 성과 성곽은 응당 예전 그대로이겠으나
只恐令威去不歸[지공영위거불귀] : 다만 영위가 가서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웁구나.

 

慶源[경원] : 함경북도 북단에 있는 군.

三水[삼수] : 함경남도 북부, 압록강 상류 이남에 있는 군, 삼수갑산으로 유명.

北靑[북청] : 함경남도 북동부에 있는 군.

令威[영위] : 丁令威[정영위], 漢[한] 나라 때 遼東[요동] 사람으로  

   그가 일찍이 靈虛山[영허산]에 들어가 仙術[선술]을 배워,

   뒤에 학으로 변하여 요동에 돌아와서 성문의 華表柱[화표주]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갔다는 고사.

 

이 시는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詩讖[시참]이 되었다.

詩讖[시참 : 心[무심]히 지은 자기의 시가 然[우연]히 뒷일과 꼭 맞는 일.

 

雜錄[속잡록]에는

이 시에 관련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奇自獻[기자헌 : 1562-1624]과 함께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

떠나기에 임하여 전송하는 동료에게 말하기를,

명년 8월에 마땅히 다시 돌아올 것이니,

그때 서로 만나 보아도 늦지 않소하고,

시를 읊기를, 위의 시와 같이 읊었다.

중에 서로 익살을 부리면서 시름과 피로를 씻었다.

역참에 나오는 마부를 보고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기다린다면 일찍 돌아올 것이다.’ 하였다.

기자헌은 둥주리를 타고, 오성(이항복)은 부담을 탔는데,

기자헌에게 말하기를,

令公은 둥주리 같은 액을 만났네.’ 하니,

기자헌은,

영공은 도처에 浮談(허튼 이야기)이로다.’ 하였다.

오성이 북청에 있을 때 노래를 지으니,

鐵嶺第一峰[철령 제일봉]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孤臣寃淚[고신원루]를 비 삼아 가져다가

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 본들 어떠리하였다.

이 노래가 서울 장안의 궁인들에게 전파되니

광해가 이 노래를 듣고 누가 지은 것이냐고 물었다.

궁인이 사실로써 대답하니,

광해는 수심에 싸여 기뻐하지 않았다.

그래도 소환하라는 명은 없었다.

! 사람의 마음이 한번 그르치게 되면

깨닫기 어려움이 이에 이르는구나.

오성은 실로 세상에 드문 大賢이요,

동방의 名相[명상]인데 말세에 태어나서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니, 한스러운 일이다

[與自獻俱謫咸鏡道北靑

臨行謂餞僚曰 明年八月

當復還來 其時相見不相遲也

因吟詩曰

雲日蕭蕭晝晦迷 北風吹破遠征衣

遼東城郭應依舊 秪恐令威去不歸

途中相與詼諧

以消憂勞見出站處大噱曰

若知待候 可以早來

奇乘둥주리

鰲城騎浮擔謂奇曰

令公은둥주리 을맛낫

奇曰令公到處浮談이로다

在北靑有詞曰

鐵嶺第一峰의자고가는 져구룸아

孤臣冤淚을 비사마 가져다가

님겨신 九重宮闕려본들 엇더리

其詞傳播都下宮人

光海聞是詞 問誰所作也

宮人以實對 光海愁然不樂

猶不有召還之命 嗚呼

人心一誤 難悟至此

鰲城實是曠世大賢 東方名相

生於季世 不能容 可恨].”

원주용, 조선시대 한시 읽기 ,

이담, 2010, 101~102

 

白沙先生集卷之一

[백사선생집1권] 詩[시]

 이항복[1556-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