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기생이라면 양반들의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을 추거나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어 노리개의 역할을 하는 사람 쯤으로 알고 있으리라.
여기 소개하는 홍낭[洪娘]의 시는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만큼
순수한 우리말로 다듬어진 짜임새 있고 산뜻한 느낌이 드는 시조입니다.
종장[終章]의 함축미[含蓄味]는 가히 일품[逸品]이지요......
묏버들 갈희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에
자시는 窓[창] 밧긔 심거두고 보쇼셔
밤비에 새 닙 곳 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쇼서.
그녀의 사랑하는 낭군 최경창[崔慶昌; 1539-83, 字는 가운(嘉雲)
號를 고죽[孤竹]이라 함. 인품이 호매[豪邁]하고 학문에 뛰어나
이이[李珥]와 더불어 문장[文章]이라 일컬음]과의 일화를 올립니다.
위 시조를 받은 연유인즉
고죽[孤竹]은 북도평사[北道評事]의 직책을 받고 함북[咸北] 종성[鍾城]으로
부임하다가 홍낭[洪娘]을 만나게 되어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같이 막중[幕中]에
머물게 되면서 애정을 불태웠으리라.......
다음해 봄이 되어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니 홍낭은 영흥[永興]까지
따라와 작별하고 돌아가는 길에 함관령[咸關嶺]에 이르러 날은 저물고
비까지 내리는지라 그리움을 위 시조에 담아 고죽[孤竹]에게 보냅니다.
이 시조를 받아 본 고죽은 한시[漢詩]로 번역[飜譯]하는데 이 번역시 또한
일품입니다.
折楊柳寄與千里人[절양류기천리인:묏 버들 가려 꺾어 천리먼곳 님에게 보내노라]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 나를 위해 뜰 앞에 심어 놓으소서]
須知一夜生新葉[수지일야생신엽 : 간밤 비에 새잎 나거든 알아주소서]
樵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 초췌하고 수심어린 눈썹은 첩의 몸임을]
이렇게 멋진 글을 받고보니 최경창도 답시를 지어 보냅니다.
玉頰雙啼出鳳城[옥협쌍제출봉성 : 고운 뺨에 눈물지으며 봉성을 나설적에]
曉鶯千전爲離情[효앵첮전위리정 : 새벽 꾀꼬리 지저귐은 이별의 정 때문이네]지저귈 전
羅衫寶馬汀關外[나삼보마정관외 : 비단 적삼에 명마를 타고 하관 밖에서]
草色超超送獨行[초색초초송독행 : 풀빛 아스라히 홀로감을 전송하네] 멀 초
이별의 아픔을 달래가며 어언 3년이 흐르고 고죽[孤竹]이 병상[病床]에 있다는
소식에 홍낭[洪娘]은 홍원을 떠나 7주야[晝夜]를 달려 최경창을 문병[問病]하지만
세간의 입소문은 쉬이 퍼지는 법이라......
그당시는 명종[明宗]의 비[妃] 인순왕후[仁順王后]가 돌아가시어 국상[國喪]중이라
국모[國母]의 상중[喪中]에 관원이 기생과 놀아 났다하여 최경창은 파면[罷免]되고
홍랑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에 또 한번의 이별시를 부르게 되니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란 :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난초)을 주노라]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 오늘 하늘 끝으로 떠나가면 언제 돌아 올까]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 함관령의 옛노래 부르지 마라]
只今雲雨暗靑産[지금운우암청산 : 지금까지도 비구름에 청산이 어두웁나니.....]
아마 고죽[孤竹]은 파면보다도 洪娘과의 이별이 더욱 哀痛하지 않았을까요 ?
이렇게 둘은 또다시 이별의 한을 품은채 멀어지고 최경창은 벼슬길이
평탄하지 못하고 좌천과 사직을 거듭하다가 43세에 또다시 종성부사로 나가
홍랑과 재회 하였지만 파격적인 진급에 항의를 받아 다시 성균관 직강으로
돌아오게 되는 바
煙雨空몽提柳垂[연우공몽제유수 : 뽀얀 안개비속에 버들은 늘어져]가랑비올 몽
行舟欲發故遲遲[행주욕발고지지 : 가는 배는 떠나려고 일부러 느릿느릿]
莫把離情比江水[막파이정비강수 : 이별의 정일랑 강물에 비기지마오]
流波一去沒回期[유파일거몰회기 : 강물은 한번 흘러가면 다시는 못 오는 것을.....]
이별시만 읊다가 세월 다 보내게 생겼네요......
암튼 1583년(선조 3년) 45세의 젊은 나이에 객사[客死]하게 됩니다.
洪娘은 파주에 있는 孤竹의 묘에 찾아가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하면서 천하일색의 미모를 감추기 위해 얼굴에 칼을 대어 추녀로 변신하고
숯덩어리를 먹어 벙어리가 되어 창을 못하게하여 홀로 살게 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그녀는 최경창의 글과 글씨를 가지고 종적을 감추게 됩니다.
왜란이 평정되자 孤竹 최경창의 유품을 해주최씨 문중에 전해주고
홍랑 본인은 최경창의 무덤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내용은 해주 최씨 문중에 전해지며 지금도 파주 최경창의 묘소엔
본부인과의 합장묘 아래 홍랑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홍낭의 시비[詩碑]를
세워 그녀의 사랑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홍랑의 노고에 고죽유고[孤竹遺稿]가 남게되고 (숙종 9년 1683년 간행)
우암 송시열이 序를 쓰고 남구만이 발문을 써서 발행되었다네요......
天下一色의 미모[美貌]에다 시조에도 재능이 있는 洪娘의 절개[節槪]에
현대인들의 비 정상적인 생활상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리라
허기사 차영같은 인간도 있기에
조용기의 아들같은 난봉꾼도 있겠지요.
그래도 돌지둥은 착하게 살렵니다.
홍랑같이 한 연인만을 일부종사 하듯이.......
돌지둥[宋錫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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