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次尹景任[차윤경임] 韻[운]

돌지둥[宋錫周] 2024. 7. 26. 11:20

次尹景任[차윤경임] 衡聖[형성] 韻[운]  宋時烈[송시열]

경임 윤형성의 운을 차하다.

 

南山誰聽寗歌悲[남산수청녕가비] : 남산에서 누가 슬픈 영척의 노래 들으랴
自謂非狂笑食其[자위비광소이기] : 스스로 안 미쳤다고 이르던 역이기 비웃네.
只把陳編期有得[지파진편기유득] : 다만  옛 책을 잡고 깨달음 있길 바랐으니
那將萇草樂無知[나장장초락무지] : 어찌 장초가 즐기던 무지를 받들었을까 ?
楚江蘅芷秋猶馥[초강형지추유복] : 초나라 강의 두형 방지 가을에 향긋해도
聖路荊榛世莫披[성로형진세모피] : 성인의 길 가시덤불 세상에 열지 말게나.
夫子又尋崖海去[부자우심애해거] : 그대 다시 해안 찾아 떠나가고 말았으니
更憐雲翅困低垂[갱련운시곤저수] : 구름 날개 지쳐 낮게 드리우니 더욱 애처롭네.

 

景任[경임] : 尹衡聖[윤성현, 1608-1676]의 자, 호는 棄棄齋[기기재]. 

   55세 1662년 증광 문과에 급제, 정언, 사간, 삼척 부사, 진주 목사 등 역임.

寗歌[영가] : 甯戚飯牛[영척반우], 甯戚[영척]은 춘추 시대 衛[위]나라 사람으로

   집이 가난하여 남의 수레를 끌어 주며 먹고살았다.

   그러다가 齊 桓公[제 환공]을 만났을 때 쇠뿔을 두드리면서 노래하기를

   "남산은 깨끗하고 흰 돌은 눈부시네.
   요순이 禪讓[선양]하던 시절을 못 만나니,

   短布[단포] 單衣[단의] 정강이뼈까지 이르렀네.

   저물녘부터 한밤중까지 소에게 꼴 먹이니
   길고 긴 밤 언제 가고 아침이 오려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제 환공이 이상하게 여겨 管仲[관중]을 시켜 만나 보게 하고는

   그를 맞아들여 大夫[대부]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藝文類聚 卷94[예문유취] 寧戚飯牛[영척반우]

    여기서는 윤형성이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55세가 될 때까지 은거한 채

    벼슬하지 않은 것을 영척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食其[이기] : 酈食其[역이기], 陳留[진류] 高陽[고양] 사람,

   글 읽기를 좋아했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고을의 監門吏[감문리]로 생계를 꾸렸는데,

   그때 고을의 세력가에게 부림을 당하려 하지 않아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다 劉邦[유방]이 진류의 교외에 오자, 유방을 아는 고을 사람에게 소개를 청하면서 말하기를

   "사람들은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만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다."라고 전하게 하였고,

   그 뒤로 유방을 만나 유세객이 되었으나 결국에는 齊王[제왕]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史記[사기] 酈食其列傳[역이기열전]

   윤형성이 결국 영달을 위해 청탁하는 역이기의 모습을 비웃으면서 은거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陳編[진편] : 옛날의 서적.

萇草[장초] : 隰有萇楚[습유장초], "습지에 장초가 있으니 그 가지 부드럽네.

   어리고 윤기 나니 세상모르는 너 부럽구나."라고 하였는데, 시 경 檜風[회풍]

  이 시는 당시에 정사가 번거롭고 세금이 중하여 백성이 고통이 심하므로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초목이 부럽다는 뜻으로 읊은 것이다.

   여기서는 윤형성이 그런 초목을 부러워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정사에 참여하여 자신의 뜻을 펼치고 개혁할 뜻이 있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蘅芷[형지] : 杜蘅[두형]과 芳芷[방지], 楚[초]나라 屈原[굴원]의 離騷經[이소경]에

   "두형과 방지도 섞어 심었네." 라고 함. 뜻이 같고 도가 합한 친구끼리 쓰는 말.

   둘 다 향초의 일종인데, 주로 은거하는 군자나 현인을 비유하는 뜻으로 쓰인다.

荊榛[형진] : 가시나무와 개암나무, 무성한 잡복림.

海去[해거] : 1674년 甲寅禮訟[갑인예송] 때 윤형성이 司諫[사간]으로 있으면서

    송시열의 편을 들다가 파직된 것을 두고 한 말인 듯하다.

 

宋子大全卷四[송자대전4권] 詩[시]○七言律詩[칠언률시]

송시열[1607-16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