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들의 역사자료

宋通川墓碣銘 幷序

돌지둥[宋錫周] 2016. 9. 19. 11:29

宋通川墓碣銘 幷序 



 

 

昔邴曼容官而止於千石。談者高其致。若故松潭宋公。彊而服官。耆而休一壑。三十年而不渝也。豈聞曼容之風而興者耶。東陽申欽次其行而敍之曰。公諱枏壽。字靈老。氏出恩津。初祖大原。高麗判事。三傳至明誼。官司憲執端。入我朝有諱愉。隱德不仕。號雙淸堂。高祖曰繼祀。司憲府持平。曾祖曰遙年。軍資監正。祖曰汝霖。楊根郡守。考曰世勛。安岳郡守。贈戶曹參議。妣曰鄭氏。迎日望閥。進士鸞年之女。政堂文學思道之後。嘉靖丁酉生公。十六歲而參議公捐館舍。公奉母夫人盡誠敬。後十年而遭母夫人喪。守制踰禮。萬曆戊寅。通籍爲司圃署別提。歷義盈庫直長,尙衣院主簿,司憲府監察,定山縣監,宗簿寺主簿,尙衣院判官,平市署令,戶曹正郞,通川,林川郡守。凡所莅。皆有績。通民至豎石頌德。在林川也。丁倭寇。被帥臣誤劾下理。將抵軍律。朝廷察其冤得釋。自此不復仕。歸桑梓老焉。丙午。陞折衝副護軍。丙辰。以年八十例授嘉善。天啓丙寅。公九袠矣。因子弟乞恩。特命進秩嘉義。異數也。是年冬。終于莊舍。得年九十。翌年春。窆于公州沙寒里乾坐之原。先兆也。公有雅操。平生無疾言遽色。早抛擧子業。而顧喜書史。不釋手。不修飾邊幅。而能篤行。祭先極其虔。敎子弟以方。待同氣以至情。孝友之著於家如此。在京師。家終南山下。有軒扁曰賞心。左右圖書。焚香正坐。於世累泊如也。及還鄕。重修雙淸舊業。雜植松菊梅竹。嘯詠其間。聞某水某丘有佳境。或携壺獨往。或命侶俱遊。不知倦也。日與親戚相對。不設畛域。信義交孚。鄕黨悅服。諸有疑事。必來請敎。築室於先壟下。有披雲寮七級臺之號。長安名勝。遞筒酬唱。以侑其樂。良辰令節。子姓滿前。置酒張樂以娛公。公以大耋之年。婆娑優佚。人以地上仙目之。爲詩沖澹。作字有法。雖耄期之後。遺人翰札。必細書成行。見者嘆賞。待人接物。周詳曲盡。吉凶慶弔。各稱其情。易簀之日。老少畢至。平日未嘗及門者。皆來哭而必哀盡焉。屬纊前日。召子弟作永訣書。分寄異居親屬。且書一牘示親族之在前者曰。不佞非無誠孝敦睦之心。而少無所學。長益浮靡。虛負一生。已而溘然。嘗抄古人言行。名曰檢身要訣。以見其志云。初娶全義李氏。縣監翰之女。再娶晉州柳氏。高麗大丞車達之後。有婦道。克內相。生于嘉靖己亥。歿于萬曆庚戌。享年七十二。與公同壙。有三男二女。男長希遠。成均館學諭。先公卒。次希建。翊衛司副率。次希進。奉先殿參奉。女長李溟。咸鏡道觀察使。次進士金光裕。希遠娶牧使金纘先女。生二男四女。男曰國銓,國焞。女曰李蓁,朴構,盧文漢。希建娶主簿李天裕女。生四男四女。男曰國蓍,國龜,國豪。女曰李穙,蘇東道,金巽賢。餘幼。希進娶參奉鄭烿女。生二男三女。男曰國士,國材。女曰李陽煥,陸止寬。餘幼。李溟生二男二女。男曰敏開主簿。曰敏樹正郞。女曰沈,金震柱,金光裕。一男曰慶餘。內外孫五十餘人。噫。三十年爲一世。公卽二世人也。人之求壽者。有鍊丹煎石而求之者。有餌精服氣而求之者。乃若公如如淡淡。全其天而得之。其鮮矣哉。余不知曼容之得其壽如公也耶。史氏不述焉。如不得公之壽。則曼容其少遜於公乎。銘曰。
一丘一壑。一觴一詠。所可傳者迹。而不可傳者神。車馳馬犇。外強中乾。名湮滅而不伸。較厥得失。孰讆孰眞。乘化而歸。全吾天機。若公者乃古高蹈之倫。過公神道。疇不式焉而欽。欽銘而无愧。寔詔來今。

 

 옛날 병만용(邴曼容)은 벼슬살이하다가 천 석(石)에서 그만두자 담론하는 자들이 그 품격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고(故) 송담(松潭) 송공(宋公) 같은 이는 40세가 되어서야 벼슬살이하고 60세에는 그만두고 한 골짜기에서 즐기고 쉬면서 30년이 지나도록 그 뜻을 변치 않았으니, 혹시 만용의 풍도를 듣고 떨쳐 일어난 이가 아닌가. 동양(東陽 평산(平山)의 고호로 상촌의 본관임) 신흠은 그 행적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남수(柟壽), 자는 영로(靈老), 성씨는 은진(恩津)에서 나왔다. 시조는 대원(大原)으로 고려 때 판사(判事)를 지냈고 3대를 내려와 명의(明誼)에 이르러서는 벼슬이 사헌집단(司憲執端)이었으며, 아조에 들어와 휘 유(愉)가 있는데 숨은 덕을 지녀 벼슬하지 않았고 호는 쌍청당(雙淸堂)이다. 고조는 계사(繼祀)로 사헌부 지평이고, 증조는 요년(遙年)으로 군자감 정(軍資監正)이고, 조부는 여림(汝霖)으로 양근 군수(楊根郡守)이고, 선고는 세훈(世勛)으로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내고 호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선비는 정씨(鄭氏)로 영일(迎日) 망족(望族 세력이 있는 명문 대가)인데 진사 난년(鸞年)의 따님이자 정당문학(政堂文學) 사도(思道)의 후손이다.
가정 정유년(1537, 중종32)에 공을 낳았는데 16세 때에 참의공이 세상을 떠났다. 공은 모부인을 모시되 정성과 존경을 다하였고 다시 10년 뒤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 상제(喪制)를 지키고 슬퍼하는 정이 예를 넘어섰다. 만력(萬曆) 무인년(1578, 선조11)에 벼슬하여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가 되었고 그 뒤로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상의원 주부, 사헌부 감찰, 정산 현감(定山縣監),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상의원 판관, 평시서 영(平市署令), 호조 정랑, 통천(通川)ㆍ임천 군수(林川郡守) 등을 역임하였는데 맡은 곳마다 다 공적이 있었으며 통천의 백성들은 비석을 세워 은덕을 기리기까지 하였다. 임천에 있을 때 왜구의 침략을 만났는데 수신(帥臣)이 사실을 잘못 알고 공을 탄핵하여 심리에 부쳐 장차 군율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조정에서 그 억울함을 알고 풀어주었다. 이로부터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 노년을 보냈다.
병오년(1606, 선조39)에 절충(折衝) 부호군(副護軍)으로 승진되었고 병진년(1616, 광해군8)에는 나이 80세가 된 자에 대한 규례에 따라 가선(嘉善)에 제수되었으며, 천계(天啓) 병인년(1626, 인조4)에는 공의 나이가 90세가 되어 자제들의 걸은(乞恩)으로 인해 특명으로 가의(嘉義)에 승진되었으니, 특별한 은총이었다. 이해 겨울에 본가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 90세였다. 다음해 봄에 공주(公州) 사한리(沙寒里) 건좌(乾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선대의 묘역이다.
공은 청아한 지조를 지녀 평생 동안 거친 말과 조급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거자(擧子)의 공부를 일찍이 포기하였으나 서사(書史)를 좋아하여 손에 놓지 않았고 외모를 꾸미지 않고 능히 독실하게 실천하였다. 선조에게 제향을 드릴 때는 그 정성을 다하고, 자제를 가르칠 때는 의로운 방도로 하고, 동기간을 대할 때는 지극한 정으로써 하였으니, 효도와 우애가 가정에 드러난 것이 이와 같았다. 서울에 있을 때는 종남산(終南山) 아래에다 집터를 정하고 정자를 두어 상심헌(賞心軒)이라 편액을 달고서 도서를 좌우에 배치하고 향을 피우며 바르게 앉아 세상사에는 무관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쌍청당의 옛집을 중수하여 소나무ㆍ국화ㆍ매화ㆍ대나무를 뒤섞어 심어놓고 그 사이에서 흥얼거렸으며, 어느 강 어느 산에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혹은 술병을 들고 혼자 찾아가기도 하고 혹은 벗을 불러 함께 노닐어 피곤한 줄을 몰랐다. 날마다 서로 대하되 서로의 간격을 두지 않아 신의를 서로 얻었기 때문에 향리 사람들이 기뻐하고 열복하여 언제나 의심나는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대의 묘역 아래에 집을 짓고 피운료(披雲寮)ㆍ칠급대(七級臺)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장안(長安)의 명류들이 시를 우편으로 수창(酬昌)하여 그 즐거움을 돋구었다. 좋은 때와 명절에는 자손이 다 모여 술을 준비하고 풍악을 울려 공을 즐겁게 하면 공은 극노인으로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즐거워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지상의 신선으로 지목하였다.
시를 지을 때는 온화하고 소박하게 하였으며 글씨를 쓸 때는 법도가 있어 80~90세가 된 뒤에도 남에게 보내는 간찰은 반드시 줄을 똑바로 잡아 잘게 썼으므로 보는 이들이 감탄하였다. 사람을 대하고 외물을 접촉할 때는 자상하여 성심을 다하였고 길흉과 경조사에는 각기 그 정례(情禮)에 맞게 하였으므로 임종하던 날에 노소가 전부 찾아왔고 평소에 집에 온 적이 없는 자도 다 와서 곡하여 애도를 다하였다. 임종하기 하루 전에 자제를 불러 영결(永訣)하는 글을 지어서 멀리 따로 사는 친족에게 나누어 부치고 또 한 간찰을 써서 앞에 앉아 있는 친족에게 보이기를 “불녕(不佞)이 부모에 대한 효성과 친족에 대한 화목하고 친근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려서는 배운 것이 없고 자란 뒤에는 더욱 방종하게 생활하여 일생을 헛되이 저버렸습니다.” 하고 곧 숨이 끊겼다. 일찍이 옛사람의 언행을 초하여《검신요결(檢身要訣)》이라 이름을 붙여 자신의 뜻을 보였다고 한다.
초취(初娶)는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현감 한(翰)의 따님이고 재취는 진주 유씨(晉州柳氏)로 고려 대승(大丞) 차달(車達)의 후손인데 부도(婦道)를 지녀 내조를 잘하였다. 가정 기해년(1539, 중종34)에 태어나 만력 경술년(1610, 광해군2)에 별세하여 향년 72세였는데 공과 합장하였다.
3남 2녀를 두어 장남 희원(希遠)은 성균관 학유로서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다음 희건(希建)은 익위사 부솔(翊衛司副率)이고, 다음 희진(希進)은 봉선전 참봉(奉先殿參奉)이며 장녀는 이명(李溟)에게 시집갔는데 함경도 관찰사이고, 다음은 진사 김광유(金光裕)에게 시집갔다. 희원은 목사 김찬선(金纘先)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국전(國銓)ㆍ국돈(國焞)이고 딸은 이진(李蓁)ㆍ박구(朴構)ㆍ노문한(盧文漢)에게 시집갔다. 희건은 주부(主簿) 이천유(李天裕)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4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국시(國著)ㆍ국귀(國龜)ㆍ국호(國豪)이고 딸은 이업(李道)ㆍ김손현(金巽賢)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희진은 참봉 정융(鄭烿)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국사(國士)ㆍ국재(國材)이고 딸은 이양환(李陽煥)ㆍ육지관(陸止寬)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이명(李溟)은 2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 민개(敏開)는 주부(主簿)이고 민수(敏樹)는 정랑이며 딸은 심로(沈ㆍ김진주(金震柱)에게 시집갔다. 김광유(金光裕)는 1남을 낳았는데 이름은 경여(慶餘)이다. 내외의 손자가 50여 인에 이른다.
아, 보통 30년을 1세(世)로 따지는데 공은 곧 3세를 산 사람이다. 장수를 구하는 사람 중에는 단사(丹砂)를 제련하고 돌을 구워서 먹어 구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천지 자연의 정기를 복용하여 구하는 자도 있으나 공처럼 통상적이며 덤덤하게 사는 것으로 그 하늘이 준 수명을 보전하여 그대로 누린 경우는 드물 것이다. 나는 만용(曼容)이 그 수명을 공처럼 누렸는지 모르겠다. 그에 관해서는 사가(史家)가 기록해 두지 않았는데 만일 공과 같은 수명을 누리지 못했다면 만용은 그 수양이 공보다 조금 못하다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一丘一壑觴一詠한 언덕 한 골짝에 술 한 잔 시 한 수 
所可傳者迹而不可傳者神전할 건 그 자취요 못 전할 건 정신일레라 
車馳馬犇外強中乾수레 말 휘몰며 겉은 피둥피둥 속은 깡마른 자 
名湮搣而不伸그 이름 소멸되어 흔적 없나니 
較厥得失득실 서로 따져볼 때
孰讆孰眞가짜는 누구 진짜는 누구인가 
乘化而歸全吾天機자연의 변화 타고 돌아가 내 천진 보전했나니
若公者乃古高蹈之倫공 같은 이는 옛적의 은자 무리로세
過公神道공의 신도 지나는 자
疇不式焉而欽欽어느 누가 존경하여 삼가지 않으리 
銘而无愧명을 쓰며 부끄러움 없으니 
寔詔來今이로써 후인에게 고하노라

 

 

 

 

 邴曼容[병만용]은 漢哀帝[한애제] 때의 高士[고사] 邴丹[병단]임.

     만용은 그의 자임. 벼슬살이하면서 차츰 승진하여 1년 동안 받는 녹이 6백 석이 넘기전에

     그냥 사직하고 떠났으므로 그 청렴한 명망이 그의 숙부인 병한(邴漢)보다 더 높았다고 함.

     漢書 卷72 王貢兩龔鮑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