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들의 역사자료

壬辰倭亂[임진왜란]의 節義[절의]

돌지둥[宋錫周] 2021. 5. 17. 08:54

어제 음력 4월 14일이

임진왜란이 일어난지

429년이 되는 날입니다.

 

안타까운 과거를 되돌아보며

마음 다져봅니다.

 

임진왜란]의 節義[절의] 

상촌 신흠[象村 申欽]

 

苔軒[태헌] 高敬命[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의로움을 세웠는데,

高苔軒敬命樹義於壬辰之亂

[고태헌경명수의어임진지란]

 

태헌 아들 종후가 복수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또 진양성[진주성]이

함락되던 날에 죽었으니,

부자가 함께 순절한 것이야말로

진 나라의 卞門[변문]

그 아름다움을 짝한다 하겠다.

苔軒之子從厚以復讎起兵

[태헌지자종후이복수기병]

又死於晉陽城陷之日

[우사어진양성함지일]

父子同節[부자동절]

媲美於晉之卞門[비미어진지변문]

 

종후 역시 문장에 능했는데

그가 말에 기대 순식간에 지은

檄文[격문]은 너무나 훌륭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가 濟州[제주]에서

말을 모집할 때 지은 글 중에,

從厚亦能文章[종후역능문장]

倚馬草檄[의마초격]

華藻驚人[화조경인]

其募馬於濟州也[기모마어제주야]

 

소매를 떨치고 

  일어날 사람이

바다 밖에도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네. 

投袂而起者[투몌이기자]

吾知海外有人[오지해외유인]


채찍을 손에 들고

  임하였으니

천하에 말이 없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執策而臨之[집책이임지]

莫曰天下無馬[막왈천하무마]

 

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말의 의미가 놀랄만큼 절묘하고 

對偶[대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으므로 

한 때 널리 암송되기도 하였다. 

有曰[유왈]

語意警絶[어의경절]

對偶天成[대우천성]

一時傳誦[일시전송]

 

애석하구나 !

그런데 이런 자질을 가지고도 

끝내 불우하게 되고 말았으니 

惜乎[석호]

有此人才而終於落拓也

[유차인재이종어락척야]

 

신묘년 봄에 

지제고 : 翰林[한림]에

선발되었다가

곧바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말았는데,

아,

조정의 인사 행정이

이 모양이었으니

어떻게 倭寇[왜구]를

불러들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辛卯春[신묘춘]

被製誥之選[피제고지선]

而旋被臺[이선피대평]

噫[희]

進退予奪如此[진퇴여탈여차]

如之何其不召寇也

[여지하기불소구야]

 

 

임진왜란 때 

東萊府使[동래부사]

宋象賢[송상현]이

성을 지키다 죽었는데,

죽기 전에

그의 家親[가친]에게

글을 보내기를,

壬辰之亂[임진지란]

宋東萊象賢守城死

[송동래상현수성사]

將死貽書其家親曰

[장사이서기가친왈]

 

외로운 성에

  달무리 졌는데

벌려선 진지에서 

  높이 임하였네.

孤城月暈[고성월훈]
列鎭高枕[열진고침]


임금과 신하의 의리

  중하고

아비와 자식의 정은 

  가볍네 

君臣義重[군신의중]
父子恩輕[부자은경]

 

그 말이

늠름하기만 한데

비록 옛날의

열혈 남아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辭語凜然[사어늠연]

雖古之烈丈夫[수고지열장부]

何以加焉[하사가언]

 

상촌선생집 제60권

晴窓軟談[청창연담] 下[하]

부분 발췌함.

 

 

1592년 4월13일로 돌아가니

부산 앞바다가

왜선으로 가득 찼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소서행장 :

1558?-1600]를 총사령으로 한

선봉군 2만여명은

700척의 전함에 나눠타고,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습니다.

 

14일 새벽부터 벌어진

난전 끝에 부산진이

속절없이 함락됐습니다.

왜군의 다음 목표는

동래성이었지요.

 

당시 동래부사는

송상현(1551~1592)이었는데요.

14일 오전 10시쯤

동래성에 이른 왜군이

선발대 100명을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즉시 길을 비켜라”라고

항복을 종용합니다.

 

송상현 부사는

“(네 놈들과) 싸워 죽기는 쉽지만,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

라고 일축했지요.

 

이 와중에 경상좌병사

이각(?~1592)과

경상좌수사 박홍(1534~1593)이

성을 빠져나갑니다.

동래성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황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송상현 역시

“일단 물러나는 것이 어떠냐”는

권유를 받지만

“성주가 자기 성을 지키지 않고

어디를 간단 말이냐”고

일축합니다.

 

15일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됩니다.

송상현 부사는 통나무 방패로

방어책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활 위주의 방어로는

‘나는 새도

모두 떨어뜨릴 정도’여서

‘조총(鳥銃)’이라는 이름을 얻은

왜군의 신무기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왜군의 총공세가 이어지고,

동래성이 뚫리기 시작합니다.

<임진동래유사>는

“성이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 데다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송상현 부사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심지어 왜적 가운데

통신사로 조선을 드나들며

송부사의 후대를 받은

평조익(平調益)이라는 자가

“빨리 피하라”고 재촉했지만

송상현 부사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4번 절한 뒤

태연히 붓을 들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답니다.

 

아울러

양산군수 조영규와,

송부사의 집사 신여로,

비장 송봉수, 김희수,

향리 송백 등

송부사의 핵심 측근들도

모두 살해됐습니다.

동래향교 노개방과

유생 문덕겸, 양조한 등도

함께 순절했습니다.

오늘이 음력 15일이라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