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들의 역사자료

書卽事[서즉사]

돌지둥[宋錫周] 2024. 7. 1. 06:23

書卽事[서즉사]    趙觀彬[조관빈]

즉흥적으로 쓰다.

 

漳疾淸羸寄一牀[장질청리기일상] : 병을 막다 한가하게 지쳐 잠시 평상에 기대니

壞窻虗寂雨聲長[괴창허적우성장] : 망가진 창문 헛되이 고요해 빗 소리만 크구나.

新工睡得忘飢法[신공수득망기법] : 잠자며 깨달은 굶주림 잊는 법 새로운 솜씨요

舊癖詩多足夢章[구벽시다족몽장] : 시 읊던 옛 버릇은 다만 꿈속 문장에 만족하네.

簾鷰去來知社過[염연거래지사과] : 주렴에 제비 오고 가니 사일이 지난걸 알겠고

簷花開落歎春忙[첨화개락탄춘망] : 처마의 꽃이 피었다 지니 바쁜 봄을 탄식하네.

經營適値新醅熟[경영적치신배숙] : 책을 짓고 전일하며며 새로 익은 술을 만나니

味勝村沽挹更香[미승촌고파갱향] : 마을 술보다 맛이 뛰어나 향기가 더욱 당기네.

 

社[사] : 社日[사일], 입춘이나 입추가 지난 뒤 각각 다섯째의 日[무일] 

 

悔軒集卷之二[회헌집2권] / 詩[시]

趙觀彬[조관빈,1691-1757] : 자는 國甫[국보], 호는 悔軒[회헌].

   아버지는 노론4대신인 趙泰采[조태채], 신임사화로 유배 생활.

    형조판서, 강화유수,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

 

조관빈은 辛壬獄事[신임옥사] 때 賜死[사사]된 趙泰采[조태채]의 아들.

조선의 黨禍[당화] 중에서도 참혹하기로 손꼽히는 신임옥사는,

연잉군(영조)의 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관철하려는 노론과

이를 저지하려는 소론의 치열한 권력 투쟁이 배경이 된 사건이다.

睦虎龍[목호룡]의 告變[고변]으로 많은 노론 인사들이 숙청되었는데,

老論[노론] 四大臣[사대신] 중 한 명이었던 조태채도 이때 사사되었고

그 자식들은 絶島[절도]로 유배되었다.

조관빈은 이때 興陽縣[흥양현] 羅老島[나로도]로 유배되었고,

1년 남짓 지난 35세 봄에 이 시를 지었다.

 

부친은 사사되고 형제들은 뿔뿔이 유배되어

그야말로 滅門之禍[멸문지화]를 입은 비극적 상황,

공교롭게도 당시 노론이 축출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조태구는 당숙으로

아주 가까운 친척이었다.

여성으로는 이례적으로 조관빈의 누이가 유배된 이유도

조태구를 저주한 죄목 때문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당시 조관빈 집안에서 이 사태에 얼마나 원한을 품었을지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족도 잃고 친척도 잃고 전도양양하던 환로도 포기해야 하는

절망스런 처지를 생각한다면 이 시의 담담한 어조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굶주릴 땐 잠을 자고 적적한 마음은 시로 달래며 한 잔 술도 즐기는 여유.

배고프고 외로운 고충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분하다.

 

 

이보다 몇 개월 앞서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기에 모종의 기대감이 시에도 반영되어, 회한과 자조의 감정에만 매몰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조심스런 추측도 가능하다. 실제로 이해 3월 조관빈은 해배되고 연이어 요직에 두루 제수되었으며 아버지 조태채의 관작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그 담담함의 이유는 단지 복권에 대한 열망만은 아니었을 듯하다.

 

조관빈이 정계에 복귀한 후, 정국의 부침으로 파직 등 불리한 상황을 겪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요직에 임명되는 등 관직 생활에 비교적 순탄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럼에도 조관빈은 오히려 영조의 탕평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다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사혐(私嫌)이 있는 정승에게 하직 인사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평안 감사에 부임하지 않아 파직되었다. 심지어 영조가 사친 숙빈 최씨를 육상궁으로 추숭하며 죽책문을 쓰라고 명하자 이를 거부하여 삼수부(三水府)에 유배되는 등 자신의 의리에 입각하여 임금에게조차 타협하지 않는 면모를 보인다.

 

그의 행보가 당파적 이익을 대변하는 일에 치중되었다는 한계는 있지만, 안정적인 환로보다 자신의 잣대에 충실하였던 비타협적 면모를 고려할 때, 위 시의 담담함은 정세에 따른 태도 변화라기보다 자신의 원칙을 고수한 자만이 지닌 당당함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조관빈의 선택이 올바른 처사였는지는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겠지만, 그 일생의 꼿꼿함을 오늘 내 삶의 판단에 투영해 보는 것은 누구든 가능한 일이다.

 

조관빈은 40세 가을 자신의 초상화를 보고 「화상자찬(畫像自贊)」을 지어 “슬퍼 보이는 것은 무슨 생각 때문인가? 근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若有所悲 悲者甚意 若有所憂 憂者甚事)”라는 회한 어린 말을 남겼다. 그의 꺽이지 않는 정치 신념을 생각한다면 다소 의아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그 삶의 굴곡을 함께 보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39세에 첫 번째 아내와 사별하고 이듬해 맞이한 두 번째 아내는 혼인한 지 23일 만에 사별했다. 부친을 비극적으로 여읜 지 몇 해 만에 두 번의 상처(喪妻), 아무리 굳은 심지를 가진 자라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다. 그 괴로움이 그림에도 고스란히 담겼기에 조관빈은 자신의 모습을 마주하며 슬픈 감상에 잠긴 것이 아닐까.

 

한 인간의 당당함과 쓸쓸함의 공존을 확인하며, 시련을 극복하는 인간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는 동시에 운명 앞에 작아지는 인간의 한계를 다시금 자각해 본다.

 

글쓴이   :  김효동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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