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님들의 역사자료

櫟泉宋先生墓碣銘 1

돌지둥[宋錫周] 2025. 4. 16. 18:02

櫟泉宋先生墓碣銘[역천송선생묘갈명]

 

崇禎三戊子七月戊戌[숭정삼무자7월무술]

숭정 세 번째 무자(1768년) 7월 무술(13)일에

 

櫟泉先生宋公[역천선생송공] 卒于家[졸우가]

역천선생 송공께서 집에서 돌아가셨다.

 

在朝在野[재조재야] 無不相吊[무불상조]

조정이나 재야에 있거나 서로 조상하지 않은 이가 없고

 

太學諸生[태학제생] 相率擧哀[상솔거애]

태학의 여러 유생들이 서로 잇달아 죽음을 애도하였다. 

 

鹹曰斯文喪矣[함왈사문상의]

모두 말하길 '유학자를 잃었구나.'

 

及葬[급장] 遠近人士[원근인사] 奔走觀禮者[분주관례자] 五百餘人[오백여인]

장례에 이르러 멀고 가까운 인사들이 급히 달려와 예를 나타낸 이가 오백여인 이었으며

 

書院諸生[서원제생] 操文哭奠[조문곡전] 亦惟曰斯文喪矣[역유왈사문상의]

서원의 여러 유생들이 글을 지어 곡을 하고 제사 지내며 또한 생각해 말하길 '유학자를 잃었구나'

 

嗚呼[오호] 衆口之所同然者[중구지소동연자] 天也[천야] 公也[공야]

오호라 ! 뭇 사람들의 평판이 다름이 없는 바는  하늘이 공 이로구나.

 

朱子釋斯文之文日道之顧者[주자석사문지문일도지고자] 謂之文[위지문]

주자가 유학의 도를 풀이하며 글에 날마다 도를 돌아보는 자를 문이라 일컬었으니

 

文喪則道喪[문상즉도상] 道喪則國家何賴焉[도상즉국가하뢰언]

문을 잃으면 도를 읽고 도를 잃으면 국가가 어찌 힘입을 수 있을까 ?

 

顧餘於公 以情則兄弟[이정즉형제] 以義則師友[이의즉사우]

공을 돌아 보건대 情(정)을 따르면 곧 형제요 義(의)를 따르니 곧 스승과 벗이라오

 

哭公以來[곡공이래] 倀倀然無所依[창창연무소의] 白首窮山[백수궁산] 涕不勝抆[체불승문]

공에게 곡을 한 뒤로 마음이 아득하여 의지 할 곳이 없어 흰 머리로 외진 산에서 온통 눈물을 닦지 못했다.

 

今公之孤時淵[금공지고시연] 이제 공의 고아 시연이

 

以狀來曰[이장래왈]知吾先人者[지오선인자]

행장을 가지고 와 말하기를 "나의 선인을 아는 분은

 

惟吾叔在[유아숙재] 敢以誌爲請[감이지위청]

오직 나의 아저씨가 있을 뿐이니 감히 기록을 청합니다". 하였다.

 

餘曰然[여왈연] 非餘固不可也[비여고불가야] 遂按其狀[수안기장] 而敍之[이서지]

내가 말하기를 "그러하다. 내가 아니면 진실로 할 수가 없다."하고 그의 행장을 참고하여 이를 서술한다.

 

曰公諱明欽[왈공휘명음] 字晦可[자회가] 其先恩津人[기선은진인]

공의 諱(휘)明欽(명흠)이요, 字(자)晦可[회가), 그 선조는 은진 사람이다.

 

高麗時[고려시] 有判院事諱大原[유판원사휘대원] 執端諱明誼[집단휘명의]

고려 때 판원사인 諱(휘) 大原(대원)과 집단인 諱(휘) 明誼(명의)가 있고,

 

我太宗時有諱愉[아태종시유휘유] 號雙清堂[호쌍청당]

우리 태종 때 휘를 愉(유)라 하고 호를 雙淸堂(쌍청당)이라 하는 이가 있으며,

 

又七傳而爲文正公同春先生[우칠전이위문정공동춘선생] 諱浚吉[휘준길]

또한 일곱 대를 내려와서 문정공 동춘선생 휘 浚吉(준길)이 있는데

 

盛德大業[성덕대업] 光耀史冊[광요사책] 不待書也[부대서야]

크고 훌륭한 덕과 큰 업적에 아름답고 찬란한 빛을 역사 책에 쓰기를 기다리지 못하네.

 

文正生諱光栻工曹正郎[문정생휘광식공조정랑]

문정공이 휘 光軾(광식)을 낳으니 공조정랑이고,

 

正郎生諱炳翼[정랑생휘병익] 尚州牧使[상주목사]

정랑이 휘 炳翼[병익]을 낳으니 상주목사이며, 

 

牧使生諱堯佐[목사생휘요좌]

목사가 휘 堯佐[요좌]를 낳았는데,

 

出爲叔父義禁府都事諱炳達後[출위숙부의금부도사휘병딜후]

숙부이신 의금부도사 휘 炳達(병달)에게 입양되어 후계를 이었고

 

以文學風裁[이문학풍재] 伏一世[복일세] 不幸早世[불행조세]

문학과 풍채와 용모가 한 세상을 휩쓸었으나 불행히도 일찍이 돌아가시고,

 

官止錦山郡守[관지금산군수] 號默翁[호묵옹] 是公皇考[시공황고]

벼슬이 금산군수에 그치고, 호를 默翁(묵옹)이라 하니, 이 분이 곧 공의 부친이다.

 

妣坡平尹氏[비파평윤씨] 正郎贈吏曹判書諱扶之女也[정랑증이조판서휘부지녀야]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며, 정랑으로 이조판서에 증직된 휘 扶(부)의 따님이다.

 

以肅宗乙西十二十一日生公於漢陽濟生洞第[이숙종을유십이십일일생공어한양제생돋제]

숙종 을유(1705) 10월 21일에 한양 濟生洞(제생동) 집에서 공을 낳았다.

 

容貌明瑩[용모명형] 絶異凡兒[절이범아] 生六月而能言[생륙월이능언] 

용모가 밝고 맑아 보통아이보다 특이하여 낳은 지 여섯 달 만에 능히 말을 하고,

 

甫周歲[보주세] 默翁公抱置膝上[묵옹공포치슬상] 口授文字[구수문자]

겨우 돌이 되어 묵옹공이 무릎 위에 안아 두고 입으로 문자를 가르치면

 

輒曉解不忘因以經傳句語[첩효해불망인이경전구어]

곧 깨닫고 잊지 아니하니 인하여 경전 구절을 가르쳐 주었다.

 

授之漸加[수지점가] 至一節一章[지일절일장] 如是五六年[여시오륙년]

점차 한 節(절)과 한 章(장)까지 익혀 가면서 이와 같이 한 지 5, 6년 만에

 

略通孝經論語[약통효경논어] 

대략 孝經(효경)論語(논어)

 

二南二典[이남이전] 

시경二南[이남, 周南과 召南)二典(이전, 堯典과 舜典)을 통달하니,

 

見者驚異之[견자경이지]

보는 자들이 놀라서 기이하게 여겼다.

 

稍長勵志聖賢之學言必有物[초장려지성현지학언필유물]

점점 자라나 성현의 학문에 마음을 가다듬고 뜻을 굳혀 말에는 반드시 헤아림이 있고 

 

動必以禮[동심이례] 威儀行止[위의행지] 綽有成法[작유성법]

움직임에는 반드시 예절이 있으며, 위엄과 거동과 행동하는 것이 너그럽고 넉넉한 법을 이루어

 

望之如祥麟瑞鳳[망지여상린서봉]

풍채가 마치 상서로운 기린과 봉황 같이 생각하였다.

 

景宗辛丑士禍作[경종신축사화작] 公即廢學[공즉폐학]

경종 신축(1721)년 사화가 일어나 공은 학업을 폐지하고

 

隨默翁公入沃川之塗谷[수묵옹공입옥천지도곡] 専心性理書[전심성리서]

묵옹공을 따라 옥천의 도곡에 들어가 인성과 원리의 글에 마음을 한 곳에 기울여

 

俯讀仰思[부독앙사] 夜以繼日[야이계일]

엎드려 읽고 누워 생각하며, 밤을 새워 다음날까지 계속하니

 

有得則隨手箚錄[유득즉수차록] 積成卷軸[적성권측]

깨달음이 있으면 곧 따라 손수 적고 기록해서 쌓아 책과 축을 이루었다.

 

旣而[기이] 薦遭默翁公及祖母[천조묵옹공급조모] 李夫人憂[이부인우]

얼마 안 있어 천거되자 묵웅공과 조모 이부인의 상사를 만나

 

居表盡禮[거표진례] 情文備至[정문비지]

무덤의 규범에 예를 극진히 해서 정성과 문장을 힘써 갖추고,

 

晨昏上墓號哭[신혼상묘호곡] 不避風雨[불피풍우]

새벽과 황혼에 묘에 올라 목놓아 슬피 울며 비와 바람을 피하지 않고

 

暇則覃思遺經[가즉담사유경] 造詣益深[조예익심]

틈만 나면 깊이 생각하며 글을 남기고 조예의 깊이를 더하였다.

 

纔踰冠[재유관] 已卓然自立[이탁연자립] 爲世大儒[위세대유] 從學者日進[종학자일진]

겨우 관례(20세)를 넘자 의젓하게 자립하여 세상의 큰 선비가 되니 따라 배우는 자가 나날이 더하였다.

 

間與數三朋友[간여수삼붕우] 攜大學[휴대학] 入山寺[입산사] 潛心講究[잠심강구]

틈이 나면 두 서너 벗들과 함께 대학책을 가지고 산사에 들어가 마음 가라앉혀 강구하며

 

鉤深入微而置小冊子[구심입미이치소책자] 更迭書之[갱질서지]

은밀히 들어 깊이 낚아 채  작게 만든 책을 만들어 다시 번갈아 차례로 써나가기를,

 

如朱張呂三先生知言疑義[여주장려삼선생지언의의]

마치 朱張呂(주장려) 세 선생의 말씀을 알아 의심나는 뜻을 

 

相資互發[상자호발] 弗得弗措[불득불조]

서로 돕고 서로 밝혀 깨닫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았다.

 

自是[자시] 析理命辭[석리명사] 益沛然無窒礙[익패연무질애]

이로부터 이치를 밝히고 말씀을 알리며 매우 성대하게 더하니 꽉 막힘이 없었다.

 

英宗己未[영종기미] 命薦學行可輔導東宮者[명천학행가보도동궁자]

영조 기미(1739)년에 학행으로 가히 동궁을 도와 인도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을 천거하라 명하니,

 

大臣首以公應命[대신수이공응명] 授恭陵參奉[수공릉참봉] 不就[불취]

대신들이 공을 우두머리로 하여 명령에 응하여 공릉참봉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丙寅拜侍講院諮議[병인배시강원자의] 己巳[기사] 東宮代理[동궁대리] 下別論召辭[하별론소사]

병인(1746)년에 시강원 자의에 제수하고, 기사(1749)년에 동궁 대리로 특별히 논하여 내려 불렀으나 사양하였다.

 

庚午由翊衛司衛率[경오유익위사위솔] 移宗簿主尋除忠清都事[이종부주심제충청도사]

경오(1750)년 익위사 衛率[위솔)로부터 종부시 주부로 옮기고 충청도사와

 

司憲府持平掌令[시헌부지평장령] 軍資監正[군자감정] 

사헌부 지평과 장령 및 군자감정을 임명하였고

 

甲戌特設書筵官以授之[갑술특설서연관이수지] 皆不起 [개불기]

갑술(1754)년에 특별히 서연관을 마련하여 제수하였으나 모두 입신하지 않았다.

 

乙亥秋[을해추] 除玉果縣監[제옥과현감] 時大夫人年近八耋[인시대부인년근팔질]

을해(1755)년 가을에 玉果縣監(옥과현감)에 임명하였는데, 당시에 대부인이 나이 80세이고,

 

且新喪公季[신상공계] 疾沉篤深[질침독심] 欲公勉赴[욕공면부]

또한 공의 아우를 여의었기 때문에 질병 매우 깊어졌는데 공에게 권해서 부임하게 하였다.

 

公遂慨然承順[공수개연승순] 入京拜命[입경배면]

공이 드디어 흔쾌히 명령을 좇아 서울에 들어가 명을 삼가 받드니

 

東宮遣宮官諭意[동국견궁관유의] 欲一見[욕일견] 公辭不獲[공사불획]

동궁이 궁에 딸린 관리를 보내어 한 번 보고자 한다는 뜻을 나타내니, 공이 사양하다 어쩔 수 없어

 

入對講大學[입대강대학] 仍請免書筵官[잉청면서연관] 不許[불허]

들어가 마주하여 대학을 강론하고 서연관을 면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是歲八路大飢而湖南爲尤甚[시세팔로대기이호남위심우]

이 해에 팔도에 큰 흉년이 들었는데 호남이 더욱 심하였다.

 

公到即發廩捐捧[공도즉발름연봉] 殫心措劃[탄심조획] 

공이 창고를 열어주고 봉급을 덜어서 마음을 써 계획하여

 

以爲賑飢之道[이위진기지도] 寧過[영과] 不宜有不及[불의유불급]

"기근을 구휼하는 방법은 차라리 지나치게 할지언정 마땅히 미치지 못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抄口至三千餘[초구지삼천여] 인구를 헤아리니 3천여 명에 이르렀는데,

 

方伯嫌其多[방백혐기다] 欲損之而公則不爲之動[욕손지이공즉불위지동]

방백은 그 많은 것을 싫어하여 이것을 줄이고자 했으나 공은 곧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流民之散入境內者[유민지산입경내자] 亦一視之[역일시지]

떠도는 백성들이 흩어져 경내에 들어오는 자들도 또한 한결같이 보살펴 주었고,

 

及歸計其遠近而資送之[급귀계기원근이자송지]

더불어 돌아갈 때 그 멀고 가까운 것을 헤아려 노자를 보내주니

 

以此道無餓殍[이차도무아표] 民安堵如故[민안도여고]

이에 도내에 굶주려 죽는자가  없었고, 백성이 옛날과 같이 평안히 지냈다.

 

政聲流聞[정성류문] 至有願受廛爲氓者[지유원수전위맹자]

선정하는 소문이 흘러 들리니 집터를 받길 원하는 백성들이 이르고 있었다.

 

丙子春[병자춘] 因辭東宮召命[인사동궁소명] 附陳生民困苦之狀[브진생민곤고지상]

병자(1756)년 봄에 동궁의 부르심을 사양하며 인하여 민생의 괴로운 현상을 보태어 밝히고

 

而引鄭浹饑民圖爲說[이인정협기민도위설] 請姑停今年貢賦[청고정금년공부]

송나라 鄭浹(정협)饑民圖(기민도)를 인용해 말하여 금년에는 공부(세금)를 잠시 멈출 것을 청하니

 

優批採納[우비채납] 一道貢賦[일도공부] 弁命待秋[변명대추]

도타운 비답으로 의견을 받아 들여 온 도의 공부(세금)를 가을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을 명하였다.

 

九月遭太夫人喪返于公州[구월조태부인상반우공주] 時公已向衰多病[시공이향쇠다병]

9월에 대부인상을 당해서 공주로 돌아와 장사지내니, 당시에 공의 몸이 쇠하기 시작하고 병이 많았으나,

 

而執禮一如少日[이집례일여소일] 不少懈[불소해]

집례를 한결같이 젊은 날과 같이하여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己卯上[기묘상] 冊封世孫[책봉세손] 

기묘(1759)년 초에 임금께서 세손을 책봉하고

 

除講書院右勸讀[제강서원우권독] 尋拜執義而仍兼[심배집의이잉겸] 前職[전직]

강서원 右勸讀(우권독)을 제수하고 집의를 배수하여 전직을 겸임케 하였다.

 

庚辰特旨擢拜禮曹參議[경진특지탁배례조참의]

경진(1760)년에 특지로 예조참의에 올려 제수하였다.

 

辛巳春[신사춘] 除同副承旨[제동부승지] 旋遞爲禮議[선체위례의]

신사(1761)년 봄에 동부승지를 제수하고 곧 禮議(예의)로 교체하였으나

 

因辭書[인사서] 極言進戒[극언진계]

연달아 사양하는 글로 나아가 경계의 말씀을 극진히 하였고,

 

且引朱子故事貼[차인주자고사첩] 黃請留中書[황청류중서] 凡數千言[범수천언]

또한 주자故事貼[고사첩], 황청류(黃請留)의 중서(中書)를 인용하여 범상한 수천마디 말을 하였다.

 

尋遞付副司直[심체부부사직] 八月別設講書院諭善[팔월별설강서원유선] 

이윽고 체직되어 부사직에 부쳤다가 8월에 강서원 諭善[유선)을 특별히 따로 베풀어

 

特旨除授[특지제수] 上書辭[상서사]

특별한 명령으로 제수하셨으나 글을 올려 사직하였다.

 

壬午春[임오춘] 爲省姑母[위성고모] 過京江一宿有[과경강일숙유]

임오(1762)년 봄에 고모를 살피기 위하여 한강을 건너서 하루를 묵고 있는데,

 

儒臣聞而筵白[유신문이연백] 홍문관 관원들이 이를 듣고 연석에서 임금님께 아뢰어

 

上遣史官[상견사관] 口傳敦召[구전돈소] 公辭以病[공사이병] 即南歸[즉남귀]

임금님께서사관울 보내 구두로 전하며 독촉해 부르시니, 공이 병으로 사양하고 곧 남쪽으로 돌아왔다.

 

五月莊獻世子薨[오월장헌세자훙] 八月命王世孫[팔월명왕세손] 正位東宮[정위동궁]

오월에 장헌세자가 죽으니 팔월에 왕세손을 정식으로 동궁에 명하고 

 

首拜公贊善[수배공찬성] 上疏辭[상소사] 가장 먼저 공을 찬성으로 제수하자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批以今日輔導春宮[비이금일보도춘궁] 捨爾誰先[사이수선] 

비답을 내시시어 "오늘 날 왕세자를 보필하는 것이 그대를 버리면 누구를 앞세울 것인가?"라고 하였다.

 

嘗因東宮[상인동궁] 講孟子稱旨[강맹자칭지]

일찍이 동궁을 위하여 孟子(맹자)의 훌륭한 뜻을 강론하니

 

上喜謂筵臣曰[상희위연신왈] 此時宋某若來[차시송모약래] 豈不幸耶[기불행야]

임금께서 기뻐하며 연신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때에 모가 만약 왔더라면 어찌 다행이지 않겠는가?"라 하셨다.

 

冬再遺史官敦諭[동재견사관돈재] 仍命偕來[잉명해래]

겨울에 다시 사관을 보내어 돈독히 효유하고 인하여 함께 돌아오라 명하고

 

且以手批諭意[차이수비유의] 數月之內[수월지내] 下批及傳論以十數[하비급전론이십수]

또한 손수 비답을 써서 뜻을 효유시키고, 수 개월 안에 비답을 내려  전하여 언급하여 것이 십여 차례였는데,

 

而聖恩愈益繾綣[이성은유익견권] 임금님의 은혜는 더욱 더 정의가 살뜰하여 잊지 못하니

 

公或啓或疏辭益力[공혹계혹소사익력] 공은 혹 계를 올리고 혹은 상소하여 사양하기에 더욱 힘썼으나

 

終不許[종불허] 끝내는 허락하지 않으셨다.

 

至命依願解職[지원의명해직] 以示誠意[이시성의] 又下諭曰[우하유왈]

명령이 이르자 직책에서 물러나길 원한다고 성의를 보이니, 또 뒤에 훈계하여 말하기를

 

予雖誠淺[여수성천] 其所敦勉[기소돈면] 無異於古之臨軒十使[무이어고지림현십사]

내 비록 정성은 적으나 그 도탑게 권하는 바는 옛적에 집을 찾아간 열 명의 사신보다 다름이 없으니,

 

爾須體予至意[이수체여지이] 그대는 모름지기 나의 지극한 뜻을 용납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公自念赴[공자념부] 召與仕進[소여진사] 本自有間[본자유간]

공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임금님의 부름과 벼슬에 나아가는 것은 본래 스스로 다름이 있다고 보고,

 

雖遯跡如嚴陳諸逸[수둔적여엄진제일] 未有召而不至者 [미유소이부지자]

비록 자취를 숨기지만 엄하게 베푸니 모두 편안하여 부름에 이르지 않은 이가 있지 아니하였다.

 

伊川則曰召而不來[이천즉왈소이불래] 邦有常刑[방유상형]

伊川(이천)선생이 곧 말하기를 "부르는데 오지 않으면 나라에 일정한 형벌이 있다."고 하였으니,

 

君命若是懇迫[군명약시간박] 而不思變動[이불사변동]

임금의 명하심은 이와 같이 간절하고 절박한 것인데도 움직이기를 생각하지 아니하면

 

則實非臣分所安[즉실비신분소안] 실로 신하의 분수에 편안히 할 바가 못 된다고 하였다.

 

於是因書啓言[어시인서계언] 俟病間[사병간] 

이에 서계(관원의 복명서)에 의거해 말씀들이길 병이 조금 나아지기를 기다려,

 

一謝恩命之意[일사은명지의] 한 번 임금의 명령에 사례할 생각이라 하고,

 

且請[차청]召還史官[소환사관] 使得擔舁寸進[사득담여촌진] 

또한 청컨대 사관을 소환하시면 하인을 얻어 가마를 매고 헤아려 나아갈 것이라 하니,

 

上即許之[상득허지] 임금께서 곧 허락하셨다.

 

癸未二月[계미이월] 遂發[수발] 行過黔潭文正先生書院[행과검담문정선생서원]

계미년 이월에 드디어 떠나 黔潭(검담)에 있는 문정선생의 서원을 보고 지나면서

 

以文告行意[이문고행의] 글을 지어 가야할 뜻을 고하였는데,

 

有曰[유왈]恩禮逈特[은례형특] 天書十宜[천서십의]

또 이르기를 은혜와 예도가 아득히 멀리 다르고, 임금님의 글이 전부 마땅하시니

 

必稱聖祖[필칭성조] 勗以追先[욱이추선] 

반드시 성왕의 선조를 말씀하시면서 "힘써 선대를 사모하라 하니,

 

微衷感激[미충감격] 변변치 못한 성의에 감격이 되어

 

不欲已甚[불욕이심]辭官赴召[사관부초]亦有所受[역유소수] 

장차 너무 심하게 하지 않고, 벼슬은 사양하되 부름에 나아가는 것은, 또한 받은 바가 있으나

 

時則不可[시즉불가]敢望有遇[욕망유우]

때인 즉 불가하니, 감히 만남이 있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到廣津陳疏[도광진진소] 上再遣史官促召[상재견사관촉소] 

廣津[광진] 나루에 이르러서 상소를 올리니

임금께서 거듭 사관을 보내어 재촉하여 부르시니

 

遂進至興仁門外[수진지흥인문외] 드디어 홍인문 밖에까지 나아갔다.

 

上手書論整衣以待之[상수서론정의이대지]

임금께서 손수 으견을 쓰고 옷을 단정히하고 기다리면서 

 

意遣近侍促登對者三[의견근시촉등대자삼] 時夜已深矣[시야이심의]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빨리 어전에 대하라고 하기를 세 번이나 하였으나,

때는 밤이 이미 깊었다.

 

公辭曰[공사왈]進退明白[진퇴명백] 昔賢所貴[석현소귀]

공이 사양해 말씀하기를 "진퇴가 명백한 것은 옛날 현인들이 귀히 여기던 바로

 

顚倒衣裳[전도의상] 詩人所譏[시인소기] 

의관을 정돈하지 못한다고 시인이 비웃는 바가 있으니,

 

臣雖無似[신수무이] 何敢於進身之初[하감어진신지초] 先失禮儀[선실예의]

신이 비록 무능하나 어찌 감히 자신이 나아감에 먼저 예의를 잃고

 

暗昧求對[암매구대] 以胎 聖明之羞耶[이태성명지수야]

어리섞고 어둡게 뵙기를 구하여 처음으로 임금님의 총명에 부끄러움을 끼치겠습니까?"라고 하니,

 

上秉燭讀之[상병촉독지] 亟稱善[극칭선] 仍命勿爲肅謝[잉명물위숙사]

임금께서 촛불을 잡고 읽으시고 심히 어질다 일컫고, 누차 사양하지 말라 명하시고

 

以前銜服色[이전함복색] 趁朝講入侍[진조강입시]

이전의 관함 복색으로써 아침 강연에 달려가 입시하였다.

 

蓋公未嘗以見職自處 [대공미상이견직자처]章疏稱前縣監[장소칭전현감]

대개 공이 일찍이 현직으로서 자처하지 아니하고, 상소하는 글에서 전 현감이라고 일컬어서

 

筵臣[연신]以此意陳達故也[이차의진달고야]

筵臣(연신, 경전을 강하던 신하)들이 이 뜻으로써 전달하였기 때문이다.

 

明日[명일]公隨諸臣進伏[공수제신진복] 다음 날에 공이 여러 신하를 따라서 나아가 엎드리니

 

上方講中庸상방강중용] 命公陳文義[명공진문의]

상께서 바야흐로 中庸(중용)을 이야기 하시다가, 공에게 명하여 글의 뜻을 밝히라 하니

 

公曰中庸一書[공왈중용일서] 千古帝王相傳之心法[천고제왕상전지심법]

공이 말하기를 "중용은 천고 제왕이 서로 전해오던 심법이니,

 

以此章至誠之道言之[이차장지성지도언지] 至誠非可躡致[지성비가섭치]

이 때문에 나타난 지극한 정성의 도리로 말한 지성이라는 것은 본받아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但當誠心着力[단당성심착력] 終始惟一[종시유일] 乃至於至誠[내지어지성]

다만 마땅히 참된 마음으로 힘을 들여 처음과 끝이 한결같아야 지극한 성에 이르게 됩니다."

 

上問反災致祥之道[상문반재치상지도] 公對曰妖孽[공대왈요얼]

상께서 돌아오는 재앙을 없애고 상서로움에 이르는 도리를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괴이하고 불길한 일은

 

非生於將亡之國[비생어장망지국] 生於可爲之世[생어가위지세]

장차 망할 나라에서는 생기지 않고, 가히 다스릴만한 세상에서 생깁니다.

 

殿下誠能以實應天[전하성능이실은천]則災變爲祥[즉재변위상]

전하께서 진실로 능히 실제로써 하늘에 응한다면 곧 재앙이 변하여 상서로움으로 되고,

 

轉移之機[전이지기] 惟在殿下之一心矣[유재전하지일심의]

변하여 옮기는 기미는 오직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殿下臨御四十載[전하림어사십재] 尙未見至治者[상미견지치자]

전하께서 임금에 왕림하신 지 40년에도 오히려 지극한 다스림을 보지 못한 것은

 

誠正之工[성정지공] 未至而然[미지이연] 誠正之未至[성정지미지]

참되고 바른 솜씨에 이르지 못하고 삼가하여 다스림에 이르지 못해 그렇습니다.

 

由最初格致之功[유최초격치지공] 未能至於具知也[미능지어구지야]

오히려 최초에 格物致知[격물치지]의 공부가 진실로 아는 데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上曰經筵官之言[상왈경연관지언]可謂頂門針[가위정문침]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경연관의 말씀은 頂門(정문)의 一鍼(일침)이라고 할 수 있다.

 

暮年一見[모년일견] 如得明燭[여득명촉] 늘그막에 한 번 본 것이

마치 밝은 촛불을 얻은 것과 같다."라고 하시니,

 

公辭謝曰[공사사왈]讜言嘉謨[당언가모] 日陳於前[일진어전]

공이 사양하고 감사하며 말하기를 "이치에 맞는 말씀과 신하의 좋은 의견을

날마다 미리 따라 진술하여

 

言路大開[언로대개] 羣策畢陳[군책필진] 爲禎祥[위정상]

言路(언로)가 크게 열리면 모든 계책이 모두 베풀어져 상서로운 복이 됩니다.

 

言路塞而城門閉爲妖孽[언로색이성문폐요얼]

언로가 막히면 성문이 닫혀서 요망한 것이 되니,

 

請盡釋前後以言獲罪之臣[청진석전후이언획죄지신]

청컨대 앞 뒤의 말로써 죄를 지은 신하들을 모두 석방하소서."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