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

將入金剛[장입금강]登金水亭[등금수정]

돌지둥[宋錫周] 2023. 2. 8. 13:17

將入金剛[장입금강]登金水亭[등금수정]

候同伴不至[후동반부지]

朴齊家[박제가]

장차 금강산에 들려고 금수정에 올랐는데

동행이 오지 않아 기다리며.

 

亭根石趾水環環[정근석지수환환] : 돌로 기초한 정자 밑동에 강물 돌아 둘러싸고

朝日蒼茫在笠端[조일창망재립단] : 넓고 멀어 아득한 아침 해는 삿갓 끝에 있구나.

遠峀陰晴堪悵望[원수음청감창망] : 흐렸다 개인 먼 산 참고서 시름없이 바라보다

烟波皺展入橫看[연파추전입횡간] : 주름 펼친 안개 물결 뒤섞여 드는걸 바라보네.

花叢有露春寒淺[화총유로춘한천] : 이슬이 넉넉한 꽃 떨기에 엷게 차가운 봄날에

沙岸無人雨點殘[사안무인우점잔] : 사람 없는 모래 언덕에 사나운 비가 떨어지네.

綠草汀洲何處路[녹초정주하처로] : 푸른 풀과 물가 모래섬의 어느 곳이 길일런가

思君不見倚闌干[사군불견의란간] : 생각하는 그대는 보이지 않아 난간에 기대네.

 

貞蕤閣初集[정유각초집] 詩[시]

朴齊家[박제가 1750- 1805]

金水亭[금수정] : 조선중기에 포천 영평천 절벽 위 높은 지대에

  옛 안동김씨들이 세운 정자.

  건립 초기에 정자 주인 김윤복이 양사언과 깊이 교유하여,

  이곳에서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풍류생활을 하면서

  한석봉ㆍ양사언 등 명필들의 글씨와 시를 주변 바위에 새겨 놓아

  문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조선시대 말기까지 금수정은 많은 문인들이 유람하고

  그 감회를 기록과 시로 남기는 명소가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 건립 초기 양사언과 김윤복의 풍류이다.

  양사언은 일찍이 글씨와 시와 거문고에 빼어난 재능을 지니고

  신선 같은 풍격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의 금강산 풍류에 버금가는 자취를 <금수정>에 남겼다.

  후인들이 이곳에 와서 그의 시와 글씨에 감탄하고

  김윤복과의 ‘신선풍류’를 동경했다.

 두 번째 이유는 <금수정>이 자리 잡은 영평 지역의 지정학적 특성이다.

  이 지역은 함경도와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쳐 가는 곳이어서 함경도와 금강산을 오가는 길에

  영평 지역의 명소를 답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다.